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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 | [문화저널]
<이종민의 음악편지>
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2004-05-23 14:23:00)
<이종민의 음악편지> 아 고구려! <금율악회의 거문고 연주 ‘출강(出鋼)’>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 대한 왈가왈부가 한창입니다. 선정적 화면이 던진 충격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의 ‘영화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저로서는 함부로 그 논의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다만 영화전문가들만의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런 얘기를 푸념삼아 해봅니다. 적어도 개막작의 경우에는 작품 선정에 좀더 신중해야 했다고. 영화제의 정체성이나 특성에 대한 고려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깐느 영화제 등 좀 더 비중 있는 영화제를 겨냥하여 출품을 꺼리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더하리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막작 선정에는 다른 면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모여 축제 시작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한 자리라는 점 말입니다. 일부 전문인이나 매니아들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망함으로 적지 않은 참여자들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는, 그런 폭력은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더 실망시킨 것은 개막공연의 어설픔입니다. 서양 록음악과 우리 전통 타악의 만남. 퓨전을 말할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조합입니다. 그만큼 독창성 확보가 쉽지 않겠다는 얘기도 됩니다. 쉽게 합할 수 있는 것은 싸구려 합금이기 십상입니다. 두 음악은 태생이 다른데도 겉보기로는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시끄러움과 빠른 템포. 그리고 이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노린다는 것도 흡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겉모양일 뿐입니다. 가락 자체도 이질적이지만 그 바탕이 되는 철학이나 정신세계는 뒤섞기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카타르시스나 신명에 이르는 길도 다릅니다. 거칠게 말해서, 사물놀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 타악음악에서 록음악적 요소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껍데기끼리의 부딪침은 먼지만 풀풀 날리기 쉽습니다. 알맹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합니다. 어설픈 뒤범벅은 록의 감동도 사물놀이의 신명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그날 연주에서 날라리의 끼어듦도 불순합금임을 시위했을 뿐입니다. 주책없는 방정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퓨전음악은 기존 악기나 장르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 보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독립영화가 주류영화의 대안으로 제기될 때의 명분과 괘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대안은 스스로의 한계만 노정시킬 뿐입니다. 대안의 비효용성 혹은 불필요성만 부각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전주영화제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불만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망한 개막작에 어설픈 공연. 이래저래 영화제에 대한 입방아가 작년 소리축제 꼴 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렇게 뭐를 아는 척, 입방정을 떨고 나니 음악 소개하기가 몹시 주저됩니다. 제대로 된 퓨전음악 하나 딱, 소개하면 제격일 터인데 준비된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북한 음악인 김용실이 작곡한 ‘출강(出鋼)’이라는 거문고 음악입니다. 이 곡은 흥남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힘찬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북한 음악이 그러하듯 힘차고 활기가 넘칩니다. 우리가 자주 듣던 거문고 음악과는 사뭇 그 정취가 다른 것입니다. 거문고는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하여 선비들의 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현묘한 악기”로 숭상되어 왔습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사용하는 가야금과 다르게 대나무로 만든 가느다란 ‘술대’ 하나로 줄을 처서 연주를 하기 때문에 가락에 빠른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줄도 여섯 개로 되어 있어 음역에도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인간의 변화무쌍한 성정을 다스리기에는 안성맞춤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김용실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거문고 음악이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한 귀족들의 호사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진취적이며 낙관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현에도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획기적인 악기의 개량 없이는 심약한 선비 음악 이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리라 여길 만도 합니다. 그런데 전통악기의 개량에 힘을 쏟아온 북한이 유독 거문고에서만은 실패를 하고 맙니다. 1970년대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이 곡은 정작 이 악기가 지닌 그런 ‘한계’의 극복 가능성을 열어준 ‘대안’의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남한 음악계에 이 곡이 소개된 이후에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5년 금율악회의 정기연주회에서 처음으로 재연된 후 많은 거문고 창작음악 탄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이곡이 처음 밖에 알려진 것은 한 재일동포를 통해서입니다. 60년대 일본에 온 만경봉호의 선상 공연에서 북한의 거문고 창작음악에 처음 접하게 된 그는 그 감동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문고 음악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가 이 곡의 악보와 녹음 테잎을 이세환에게 전해 줍니다. 이번에 보내드리는 연주는 우리나라 거문고 음악의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금율악회 소속 아홉 명의 거문고 연주자들이 합주를 한 것입니다. 개별 악기의 한계를 합주를 통해 극복한 것으로 왕산악 시절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느끼게 해줍니다. 선비들의 수양 음악 정도로 위축된 한계를 넘어 원래 악기가 지닌 웅혼한 특성을 되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 고구려! 우리가 잃은 것이 역사만이 아닌가 봅니다. 대안 마련이 잃어버린 것의 복구를 통해서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도 이 연주 들으며 새삼 해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역사연구에 대한 ‘대안’으로 고구려연구재단이 출범했지만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평양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리고 이의 보존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가 다름 아닌 일본의 한 원로 화가라는 점도 마음을 착잡하게 합니다. 또 다시 냄비근성을 탓해야 하나? 쉽게 끓어올랐다가 “아니면 말고!” 쉽게 손 털고 일어나버리는. 얄팍한 합금으로 얼치기 퓨전을 대안이라 쏟아내는 천박함. 아닐 것입니다. 촛불시위를 정치권 ‘황금분할’로 이끌어낸 노련함과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막강한 보수언론의 파상적인 이념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보정당 제3당으로 끌어올린 저력이 어설픈 ‘대안’에 현혹될 리 없습니다. 제가 원래 이 곡에 마음을 두게 된 것도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을 반기면서부터입니다. 이 곡이 그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진취적이며 활달한 기운처럼 진보진영의 힘이 거듭남의 가능성마저 상실한 듯한 정치권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소망을 이 곡에 실었던 것입니다. 아, 고구려! 정녕 그것은 탄식이 아니라 탄성이어야 합니다. 룡천의 참사에 우리 모두 손 걷고 나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얼치기 퓨전이 아니라 진정한 합금을 간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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