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비유로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김기덕
신귀백(2004-05-23 14:15:08)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한번도 따뜻한 위로가 된 적이 없는 그. 옹이로 가득 찬 필모그라피. <파란 대문>
의 <섬>같은 토르소 여자들이나 <해안선>의 치명적 <나쁜 남자>처럼 고통을 껴안는 그의
나이테는 보는 이를 얼마나 껄끄럽게 만들었던가. 영화 밖 세상은 자동차에 몸이 으스러
진 짐승들, 밥을 한 솥 해놓고 죽은 소녀가장, 쇠사슬로 가족을 묶은 불에 탄 자동차가 T
V의 풍경일진대 왜 우리는 김기덕의 목소리에 엇갈린 평가를 할까. 그가 던지는 불온한
상상력과 긴장은 세상의 망치 역할을 했건만 마치 그를 맞춤법이 서툴러 과락 맞고 진급
하지 못하는 학생으로 보아온 것이 평단의 메아리 아니던가. 나 역시 미완성을 안고 가는
그를 자리매김 하는 데는 정의(定議)보다는 비유로 말할 수밖에. 꼬여 화분에 담긴 분재
같은, 때론 절벽에 매달린 시퍼런 소나무 같달까.
그가 보여주는 충돌, 세상에 대한 증오는 그가 살아온 슬픈 위도일 것이라고 되차기 하던
이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통해 그가 변했다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는 안다. 불교의 가르침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하여, 그는 철
저히 대화를 생략하고 동물의 비유를 통해 화면을 전개한다. 봄.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보
여주는 대신 물고기와 개구리 또 뱀을 묶어 장난을 치는 어린 아이를 통해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업보로 진행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래, 미혹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부처의 시
작이니까. 여자를 알아 집착이 깊어지는 성장점의 여름이 보여주는 죄에 대한 싸움 역시
욕망 뒤의 벌칙이라는 보편적 인과법칙에 기댄다. 일찍이 없던 불편하지 않은 진행.
물위에 사랑을 쓰던 청년시절은 얼마나 후딱 지나가던가. 나무판 위에 반야심경을 새기며
낙원에서 추방되는 그 성숙을 위한 가을. 칼을 든 중년의 주인공에게 분노는 붉어도 고뇌는
아직 푸른 잎을 벗어나지 못해 언밸런스다. 왜? 학습보다는 깨달음을 던지는 큰스님의
역할이 너무 커서는 아니었을까. 닭으로 하여 배를 끌게 하고 이외수 소설에서나 나올 법
한 자살로 다비식까지 마치는 할베는 너무 익숙한 조연이어서 신선함을 갉아먹고. 또한
연극적 요소가 많은 겨울 장면에 이르는 고뇌에 대한 싸움을 나타내는 비유 역시 그의 인
식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한다. 하다하다 안 돼서 처박히는 곳으로의 산문(山門) 인식은
동안거(冬安居)를 견디는 스님들에게는 여름과 겨울처럼 멀다.
얼면 또 길이 나는 법. 아이를 버리고 보자기로 얼굴을 가려 번져나는 눈물로 얼음길 밟
는 장면은 역시 김기덕이다. 하지만 시지프스처럼 맷돌을 끌고 산 위로 오르는 도덕적 마
조히즘의 겨울장면은 과락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김기덕의 몸은 봐줄 만하지만 미안하게도
‘얼굴’은 아니다. 감독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이 깨달음의 내면풍경을 나타내는데 적합한가
를 고민했어야했다. 그래서 전문배우가 필요한 것 아닐까(그런데 누가 하지?). 또한 끝까
지 불상을 안은 채 산정으로 올라가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러서 타고 온 배를 불살라 버리
는 팔정도(八正道) 수행의 끝을 모르는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비유라고? 아니다.
산꼭대기에 모셔두는 그 불상은 저 밑바닥 골짜기에 처박히던지 차라리 정말 추울 때 몸을
덮히는 나무의 역할이면 김기덕이었을 텐데.
간판 내리기 기다렸다는 듯, 비디오 가게 에로물 코너에 터억 꽂힌 기덕식 용서 버전 <사
마리아>까지 보았다. 망치보다 한 바가지의 물을 건내는 느낌이었지만 어쩐지 달리는 기
차의 역방향에 앉은 듯함. 그렇지만 돈 되면 별 짓 다하는 기획과 제작의 풍토에서 ‘창작’
을 하는 근면한 감독, 그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장선우처럼 입으로 색즉시공
을 말하지 않고 임권택처럼 한국적인 것에 매달리는 강박증 같은 것도 없쟎은가. 장점이다.
그는 추상에서 구상으로, 인물화에서 풍경으로, 회화에서 건축으로 프레임을 넓히고 있다
. 시행착오는 있어도 좌절은 없는, 돌무더기에 끼어 스베루하는(적당한 한국말은?) 자동차
같이 그러나 천천히 나아가는 김기덕이 모자 쓴 채 금관 훈장을 받았다기에 가볍게 부탁
한다. 아인슈타인이 혓바닥 내놓는 사진 같이 널럴한, 게으르게 한 잠 주무시는 부처를
그리는 영화를 만들어 보시라고. 김기덕은 이제 고유명사 아닌 형용사의 김기덕이기에, 번
뇌가 커서 깨달음도 클 그이기에.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