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 사진 한 장에서 찾는 나의 행복
이정아 수녀(2004-05-23 14:13:30)
다양한 현대의 문화를 접하면서 새삼 좋은 세상이라고 감사도 드리지만 때론 너무나 많은 변화와 발전 앞에 왠지 주춤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의 아름다움과 갖가지 새로운 문화는 삶의 활력을 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기에 풍요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삶 안에 묻어있는 여러 문화 안에서 과연 내 삶의 전환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우선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 주제가 맘에 들었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조금씩 자라게 해주는 것이 있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사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우연히 형부가 주신 캐논 카메라를 처음 손에 들었던 고등학생 때부터 수도원에 들어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항상 내 손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이렇듯 익숙해진 카메라는 일상생활에서 놓쳐버리기 쉬운 작은 것들을 소중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었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었다.
여름날 반짝이는 나뭇잎이든 가을의 초라한 낙엽이든... 사진을 찍으면서 얻어지는 삶의 교훈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게 했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 중에서 몇 해 전 나의 어리석음을 알게 했고 내 삶을 뒤흔든 조각품을 사진으로 표현해보면서 묵상했던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도자들은 매년마다 8일 동안 계속되는 피정 기간을 보낸다. 이 기간동안은 침묵으로 지내면서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들을 하게 된다.
배론 성지에서 피정을 하던 때였다. 대부분 성당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중앙에 모셔 두는데 이곳 성당에는 참으로 특이한 예수님의 모습이 가운데 있었다. 십자가도 없이 양팔을 자유로이 흔들면서 왠지 춤을 추시며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인지... 아니면 세차게 얻어맞는 듯한 느낌인지... 아무튼 신선하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 특이한 것은 벽에 비쳐지는 커다란 그림자였다. 나는 너무나 신기한 매력에 끌려 매일 매일 제일 뒷자리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예수님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말씀하시려는 듯한 모습을 느끼면서... 그리고 이러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아무 것도 가진 건 없지만
어서 내게로 오라고
저기 높은 데 서서 나를 부르시는 분...
흥겨운 춤이라도 추시듯
가느다란 두 팔을 흔들며
저기 높은 데 서서 나를 눈여겨보시는 분...
당신 앞에 가까이 앉아봅니다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꾹 다물어버린 입은 아예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듣지 못하는 저를 두고 침묵하시는 분...
그리고 어제 밤... 당신은 우셨습니다
퉁퉁 부어 아예 감아버린 눈
밤새 비가 내리더니
그 소리를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허둥대는 저를 두고 밤새 우신 분...
저도 울었습니다
나만을 위한 헛된 사랑을 쫓다가
지쳐버린 저를 두고 밤새 저도 울었습니다
저기 높은 데 외로이 서서
오히려 저를 위해 춤을 추시는 분...
얼었던 저의 마음이 잔잔히 녹아갑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림자...
가만히 살펴보니 이 그림자는
당신의 빛을 받아야만 보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때 당신은 제게 속삭여 줍니다
'나처럼 빈손으로 살아보아라
나처럼 춤추며 살아보아라
내 뒤에서 내 빛으로 살아보아라
내 그림자처럼...'
괜한 두려움으로 멀리서만 바라보던 나는 어느 새 춤추는 예수님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퉁퉁 부어 감아버린 눈... 꼭 다문 입...
그리고 온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나에게 주어진 일들은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를 자랑했고 내 뒤에 예수님을 숨겨놓았던 어리석음을... 예수님이 내 앞에 계셔야만 나는 그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림자를 보며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나 자신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살아가기에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이 사진을 통해 나는 오늘도 한 걸음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다.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이정아 / 서울 성 바오로딸 수도회 미디어 영성센터에서 영상 피정을 맡고 있다. 시와 사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가톨릭 영성방송 (www.brothers.or.kr) 채널 6번 <마음의 쉬어 가는 자리>라는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