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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 | [문화와사람]
나를 잊고 나를 버리며 춤추는 ‘지구인 춤꾼’
김회경(2004-05-23 14:10:29)
춤꾼 고연세 ‘민족주의’라고 삐딱하게 딴죽을 걸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그래도 ‘핏줄’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춤꾼 고연세(32). 할아버지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이 그렇듯이, 그도 근현대사의 굴곡에서 수난의 가족력을 안고 살아온 재일교포 3세다. 대학을 다니던 때만 해도 한국이나 한국어를 알지 못했던 그가 지금은 한국 땅, 그것도 가장 전통적인 색채가 짙은 이곳 전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핏줄’을 속이지 못한 ‘숙명의 끈’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의미부여일까. 하지만 그의 춤사위를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전주전통문화센터의 한벽예술단이 지난해 선보였던 <파랑새>라는 작품에서 춤꾼 고연세는 신열을 앓는 사람처럼 몰입되고 들떠 있었다. 부안 방폐장 반대 시위현장에서도 고열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으며 그악스런 뙤악볕 아래에서 ‘삼보일배’의 고행을 춤사위로 형상화해냈다. 일본문화와 일본식 생활방식에 길들여진 재일교포 3세가 우리네 살풀이를 꼭 닮은 ‘한스러운 춤사위’를 풀어내고 있으니, 더더욱 ‘핏줄’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엔 굳이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해도 순수한 한국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봐 주지도 않구요. 저는 그저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닌, ‘재일교포 3세’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우리는 다 같이 ‘지구인’이잖아요.” 민족주의니 ‘핏줄’이니 하며 애써 편가르기 했던 것이 금새 풀이 죽고 만다. 그래도 기를 쓰고 그의 춤만큼은 ‘한’을 이해하는, ‘한국적 정서’가 짙은 춤이라고 이야기해야겠다. 대학에 들어와 ‘연극 무용과’를 다닌 그는 뒤늦게 무용을 시작한 늦깎이였지만 춤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졸업작품에서 처음엔 제 대사가 60%였는데, 연습을 진행시켜 나가면서 교수님이 대사를 줄이고 몸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처음 몸으로 표현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사는 일본인만 알아듣지만, 몸짓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잖아요. 그게 바로 춤의 매력이었어요.” 현대무용을 전공한 그이지만, 한국춤의 선(線)과 정서를 접하면서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무용가 김매자 선생을 통해서였다. 김매자 선생과의 인연이 한국무용과의 첫 만남이었다면, 임실 필봉농악 전수자 양진성씨와의 인연은 그를 전주로 이끈 직접적인 계기였다. 함께 어우러지고 신명을 나누는 한국 특유의 ‘공동체 문화’에 매료됐던 것도 필봉농악 워크샵을 통해서였다. “양진성 선생님한테서 장구를 배웠는데, 남녀노소 불문하고 함께 어울려 춤추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서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게 바로 춤이구나, 춤이 갖는 또 다른 힘을 느끼게 된 거죠. 양진성 선생님이 풍물도 배우고 한국춤도 배우고 한국의 정서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 전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주에 꼭 오고 싶었어요. 이곳이라면 뭔가 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더라구요.” 아직 일본식 발음이 배어있긴 하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은 우리식 농담까지 이해하는 수준급경지다. 한국말도 뒤늦게 무용을 하면서 배웠단다. 그것도 독학으로, 지독히도 열심히. “양진성 선생님이 말씀을 참 재미나게 하시거든요. 그런데 통역을 통해 듣다보면, 재미있는 표현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직접 그 말이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국어로 된 책을 통째로 외웠어요. 눈만 뜨면 한국어 테잎을 듣고 살았구요.” “준비하지 않으면 우연한 만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를 차곡차곡 자기 삶의 지향으로 바꿀 줄 아는 이 젊은 춤꾼에게서 호락호락하지 않다고만 여겼던 세상이 준비된 자에게는 틀림없이 넓은 품을 내어주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난 2000년 필봉농악의 뿌리인 고 양순용 선생 추모제에 참가한 그는 그때의 ‘살풀이’가 잊혀지지 않는 공연이었다고 말한다. “내 마음을 하늘에 다 맡겨버리면, 돌아가신 양순용 선생님께 다 맡겨버리면 될 것 같았어요. 잘 추느냐, 못 추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춤을 추는지 그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춤을 추고 싶어요.” <필봉농악 양순용 선생 추모제>(2000), 전주전통문화센터 기획공연 <파랑새>(2003), 부안 방폐장 반대를 위한 퍼포먼스(2003), 어린이 창극 <다시만난 토끼와 자라>(2003), 동문거리축제(2003) 등. 그가 전주에 뿌리를 내리고 관객들을 만났던 공연이다. 관객도 잊고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듯 깊은 몰입을 보여줬던 춤꾼 고연세. 그의 춤을 지켜본 누군가는 그가 전생에 무당이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시간과 공간, 존재의 개념까지 사라진 무당의 ‘신기’가 그의 춤에서 언뜻언뜻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고 춤을 만들어내면서는 너무 많은 생각들이 오가요.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무대에 오르면 머릿속이 하얗게 돼요. 춤을 추면서는 눈물, 콧물이 다 나오는 바람에 불편할 때도 있지만, 예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아무 의식없이, 아무 생각없이 모든 걸 그 순간에 맡겨버리면 돼요.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오면 진이 다 빠지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시원한 카타르시스, 노곤함 같은 게 밀려드는데 그게 너무 행복해요.” 낯선 할아버지의 땅 한국, 그리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춤’에 이끌려 숙명처럼 날아든 이곳 전주에서 혈혈단신 춤꾼으로 살아가기 위해 거친 여정에 나선 춤꾼 고연세. 그도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종종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 시달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가 순수한 ‘지구인 춤꾼 고연세’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막상 일본엘 가면 여기가 자꾸만 생각나요. 어떤 주제로 춤을 추고 싶으냐고 많이들 물으시는데, 주제는 내가 찾으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인연도 그렇지만, 춤 역시 순간적인 만남, 그냥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매일매일 연습하고 준비하면, 우연히 어떤 만남, 어떤 주제와 맞닥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가 오랫동안 ‘지구인 춤꾼 고연세’로 기억되길 바라는 것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씩씩한 개척의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찾는 자는 방황하지 않는다. 찾는 자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힘차게 걸음을 옮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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