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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 | [저널초점]
<테마기획>유용주의 노동일기
김회경(2004-05-23 13:52:12)
13년 전의 봄날 1991. 3. 6 봄 햇살 찬란합니다. 봄바람 맞으며 일을 했습니다. 못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못을 박아야 목수 일은 끝이 납니다. 막노동꾼은 마구잡이로 일을 해야 마감이 됩니다. 시간이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그저 해가 지칠 때까지 막무가내로 일을 해야 합니다. 농부들을 보십시오. 진짜 일꾼들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연을 닮아가기 때문이지요. 진짜 일꾼들은 나무처럼 묵묵하고 풀처럼 강합니다. 혹, 여러분들! 하루 내내 남의 아픈 가슴 깊은 곳에 못이나 박지 않으셨는지요? 1991. 3. 7 참 일꾼은 일을 하면서도 생각을 해야 한다. 무조건 도면만 보고, 시키는 대로 줄을 긋고 철근을 세우면 안 된다. 실제 경험이 없는 지식이 빈 껍질에 불과하듯, 생각이 없는 일이란 무의미하며 로봇에 불과하다. 참 일꾼은 창조자여야 한다. 육체에 가해지는 피로함이 극렬하면 극렬할수록 정신은 신선해진다. 정신이 극도의 순수에 다다를 때까지 육체를 밀어붙일 것. 1991. 3. 12 바람이 화사한 전형적인 봄날이다. 요즈음 눈이 무겁고 잠이 많이 오는 것도 날씨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출판사 대표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인들이 구속된 뒤, 오늘은 노동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기평) 씨가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내가 보기엔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시인과 혁명가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 것은 분명하나 공안 당국이 너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시인은 시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 체제전복이나 고무 찬양이니 다 웃기는 이야기다. 내가 알기로 박노해란 시인은 혁명가라고 하기보다는 억울하고 핍박받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누구보다도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좋은 시인이라는 것이다. 한 번 시인이면 영원한 시인이기를 바란다. 부부가 다 한꺼번에 구속이 되었는데 언제쯤 풀려날 수 있을지. 서글픈 일이다. 캄캄하고 밀폐된 감방에서, 외로움과 고문을 견디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잘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1. 3. 16 예고 없이 목수팀 팀장과 동료 일곱 명이 우리 단칸방을 방문해서 맥주 한 박스와 소주 수십 병을 박살냈다. 아내는 계속 아프다. 그렇지만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오늘은 반나절. 진흙탕 속에서 놀았다. 진흙 속에서 완전히 갇힌 즐거움, 뻘 속에서 온전히 젖은 자의 유쾌함, 나는 진창이 더 좋은 걸까? 그 곳이 편안하다. 더 젖었으면 하는 심정으로(완전히 막장인, 완전히 바닥인) 일을 했다. 이 즐거운 더러움! 1991. 3. 17. 화창한, 개떡같은 일요일. 날품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일요일이 없다. 너무나 밝고 화사한, 그리하여 봄보리 개떡에 꿀 발라 처먹으라는 어이없는 날, 멀리서 은은하게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개떡에 꿀을 발라서 주면 날름, 날름 잘 받아먹는 줄 알았지, 요 화냥년 봄날아! 나는 호락호락하게 먹지 않겠다. 개떡은 꿀 발라도 개떡이란 말이야! 어렵고 힘든,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들이 화살처럼 흘러간다. 나무의 향기를 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러야 하나. 노동은 신성한 게 아니다. 온통 저임금과 장시간의 허리아픔 뿐이다. 치사한 목구멍과 봄보리 개떡의 꿀 같은 허망치레의 봄, 일요일이 힘들게 지나갔다. 1991. 3. 19 뼛심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모두가 사기다. 책 여섯 권을 대책 없이 사다. 오랜만에 쉬는 날, 피곤하면서 행복한 날. 1991. 3. 26 선거하는 날 어머니, 오늘 하루도 나무토막 같은 몸 일으켜 작업을 했습니다. 이 투박하고 거칠은 몸도 땀과 눈물로 반죽을 하면 어머니 처녀시절 젖가슴처럼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못 박는 일에도 이력이 붙어 생손 때려 피 흘리는 일은 없어졌지만 살아 평생 얼마나 많은 못을 어머니 가슴에 박았는지요. 빼고 싶어도 뺄 수 없을 만큼 내 가슴 깊이 박혀버린 피멍든 어머니, 어머니…… 막걸리 한 사발이면 세상이 다 아름답고 그만이다. 막걸리 한 사발이면 모든 것이 오케이다. 이 개새끼들아! 그렇지만 이건 공사판에서나 가능한 일, 너희들에겐 절대로(정말 절대로) 오케이 놓지 않겠다. 막걸리 한 사발로 세상 인심을 다 잡을 수 있다고? 그건 오래 전의 일, 나는 절대로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1991. 3. 31 못을 박을 때 생손을 때리는 아픔으로 그대에게 갑니다. 생손을 때리는 아픔. 당신에게로 가는 걸음, 그 아픔보다 더 큰 상처를 기르는 일입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바람까지도 맛이 있습니다. 매콤하면서도 칼칼한 맛, 바람은 당신의 눈물맛입니다. 1991. 4. 10 어제 오전 일만 하고 동료들과 간월도에 다녀오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억지로 보았다. 빠리 고동을 줍고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솔직한 것은 좋으나, 나는 나를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사기가 아닐까? 오다가 진달래를 꺾어 왔다. 모든 것은 새벽이 말해 준다. 새벽처럼 깨끗한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꽃은 밤에도 그 자리에 있지만,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입술을 다문다. 움직이지 않는다. 많이 가려울 것이다. 고개 숙인 목련 꽃, 어제 서울로 송금을 하다. 빚을 하나 덜어 개운하기 그지없다. 그 개운함이 나를 술 마시게 했다. 그러나 조퇴까지 해 가면서 나를 기다린 아내에게 무엇을 해 주었던가? 어리광? 아양? 글쎄다. 술 취한 어지러운 모습만 보여주었을 것이다. 내가 보았던 지저분한 봄 바다, 배를 빌려 타고 관광 나온 사내 두엇이 필시 돈을 주고 티켓을 끊었을 여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후, 그 허허망망 어촌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급체와 무더위와 몸을 옥죄는 살인적인 노동.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이겼다. 1991. 4. 14. 일요일 이 쪽은 산이 별로 없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물려 있는 서해. 그 곳으로 늦게, 정말 충청도 사투리로 해가 진다. 일은 재미있게 해야 하리라. 그러나 아저씨들의 어찌할 수 없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을 늘 본다. 술과 힘든 노동과 햇빛에 익은 처절한 절망과 분노의 얼굴을 본다. 데모도 할 줄 모르는, 착하고 어수룩한 사람들, 나는 그들의 술 취한 얼굴을 보며 더 깊은 아픔을 느낀다. 울고 싶을 정도로… 무엇으로 저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언제일까. 노동이 웃음이 되고 일 자체가 재미가 될 날은. 상처투성이의 봄 밤, 목련이 처참하게 지고 있다. 꽃은 그 요절성에 큰 의미가 있으리라. 그 짧은 완성을 위해 오랜 시간 뼈와 신경이 인내한 나날들, 꽃이 오래 피어 있으면 희소가치가 적어지리라. 목숨을 걸면서 일한다. 여기는 가장 낮은 곳이다. 땅보다 더 낮으면 바다가 기다리리라. 바다는 모든 것을 안아준다. 나도 그 곳으로 흘러가리라. 하느님은 우리 이 작은 행복도 질투를 하시는가. 일요일마다 날씨가 화창하다. 날이 좋으면 내가 일을 안 할 수가 없다. 벌써 두 달째 일요일을 아내와 못 보내고 있다. 일요일에 비가 와야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다. 오오, 나의 질투심 많은 하느님! 같이 일을 하는 아저씨들의 얼굴을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 1991. 4. 24 이제 반쯤 목수가 되어 가는가. 일을 잘한다고 그득 웃고 있는 저 어여쁜 업자의 얼굴이여. 착각하지 말라. 나는 다만 일에 취할 수 있는 사람일뿐, 자네의 배를 불리려고 열심히 일해준 것이 아닐세. 몰아지경으로 나를 밀고 갔을 뿐, 세상 끝까지 나를 밀고 가고 싶을 뿐. 1991. 5. 2 돌풍과 비바람과 먹구름의 마지막 사월이 막을 내렸다. 나무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무는 죽어서도 향기를 남긴다. 사람이 죽으면서 향기를 품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강경대 열사가 억울하게 죽은 다음, 박승희(전남대 2년), 김명균(안동대 2년) 학생이 연이어 분신 자살했다. 누가 이 아까운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이 정권과 우리 시대가 죽였다. 집착과 욕심이 없는 나무는 나이테가 늘어남에 따라 향기가 더욱 그윽해진다. 인간의 뱃속은 똥만 가득하다. 바람이 몹시 차고 추운 5월이다. 1991. 5. 18 오늘 광주의 모습은 어떠할까. 살인자들은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있다. 죽은 자는 정녕 끝까지 말이 없을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황지우의 칼럼이 썩 마음에 드는 한겨레신문이었다. 나는 끝까지 죽은 자의 편에(황지우의 칼럼 편에) 서리라.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는가. 일에 취하여서인가. 사람들이(현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좋아서인가. 이렇게 오월은 깊어만 가고 상처는 나날이 깊어만 가는데.... 1991. 5. 23 몸 속의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계속해서 30도가 넘는 날씨다. 이를 악물고 참고 참지만 위를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땀방울. 산다는 것의 애처로움. 그러나 살아 숨쉬고 있음의 위대함! (끝) 유용주/ 196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제 15회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다.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 산문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장편소설 『마린을 찾아서』가 있다. 주소 : 충남 서산시 동문동 538 - 43번지 E-mail : yyj510@hanmail.net 전화번호 : 041) 666 - 0731 계좌번호 : (농협) 455-12-1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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