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8 | [문화저널]
[제77회 백제기행]
산도 좋고 물좋고 어절씨구 좋은 곳
제77회 백제기행 '생활속으로 떠나는 문화기행 - 경상도'
정한나도
이리중학교 교사(2003-04-07 10:58:59)
타는 듯한 봄가뭄으로 모내기를 하지 못해 자살한 농부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은 가뭄 끝에 백제기행에 합류를 했다. 아이들과 탈춤을 추긴 하지만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다만 기교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던 터에 문화저널에서 '고성 오광대'를 보러간다 하니 안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1년에 한번 있는 고성농요 현지공연 날짜도 운 좋게 맞아 떨어졌단다.
8월 일본기행을 앞두고 백제기행 고정멤버들이 쉬는 바람에 20명 남짓의 조촐한 출발이다. 어김없는 자기소개 시간! 나를 어떻게 소개하란 말인가? 대본대로-이름과 소속, 참가동기 등- 말하지만 이미 눈빛들이 따뜻해진다. 정철성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박형진 시인의 '가뭄'까지 읽고 나니 단비가 그리워진다. 게다가 농촌이 너무 가물어 춤꾼이나, 구경꾼들의 동원이 어려워 저녁에 있을 오광대놀이 공연이 다음주로 연기됐다니 서운하긴 해도 가뭄의 심각성을 생각게 된다. 요즘이야 기상청에서 인공강우의 시기를 고심하고 있지만,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기우제를 통해 해갈을 기원했다. 김성식 선생님의 걸죽한 입담으로 조상들의 날궂이 행태(기우제)를 듣고 난 후, 비디오로 고성오광대놀이를 미리 구경하였다. (비디오도 열이 받아서, 만만치 않은 공부였다.)
탈놀이를 일컫는 대표적인 용어가 흔히 알고 있는 '탈춤'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고 그 이름도 고유한 바, 이북에서 전승된 탈놀이를 '탈춤'(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이라 하고, 경기도 지방의 탈놀이는 '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라 하며, 부산 등지에서는 '야류'(野遊:들놀음-동래야류, 수영야류), 경남지방에서는 '오광대'(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라고 불려진다. 탈놀이가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오늘날 전승된 탈놀이는 대개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신앙적 요소보다는 탈의 익명성(匿名性)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을 가하며 웃음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남녘 끝자락 작은 고을에 전해져오는 중요무형문화재 7호인 고성오광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첫 대면은 바로 탈이었다. 탈장승제작자 이도열 선생님이 모은 자료와 작품들이 있는 갈촌탈박물관으로 들어서서, 우리는 질문부터 받았다. "배탈이 나는 이유가 뭡니까?" : '지금 나의 배탈은 순전히 과식한 나의 탓이지...!'라고 생각했을 즈음, 이도열 선생은 자신이 만든 한글 탈 부적(이 부적을 지면에 싣는 것이 어떨지요?)을 가르키며 이야기 하셨다. "탈이란 인간에게 있는 질병, 나쁜 잡신을 포함해서 자기의 행복, 희망을 방해하는 것 등 '탈이 난 것'(배탈, 돈탈, 명예탈 등)을 탈(좋은 탈)로서 막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춤은 우리에게 있는 탈(액厄)을 탈~탈~ 떨어내는 행위이지요. 유태교의 탈무드, 불교에서의 해탈은 결국 같은 의미로, 탈은 내 마음이며 부정과 긍정 속에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 대자연의 재앙에 대한 두려움과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원시시대부터 만들어진 신앙탈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연용 예능탈이 옹골지게 전시된 실내를 돌아보고 장승이 전시·제작되고 있는 바깥 마당을 둘러보면서 삶을 뒤돌아보는 일탈의 필요와 여유를 누렸다면 주인장이 말하신 도(道)의 문지방은 밟은 것이지?
기행의 평안을 위해서 탈~탈~거리는 버스가 도착한 식당(영빈관)에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고성오광대 전승회관으로 갔다. 낮엔 흙 속에서 땀 흘렸을 농사꾼이 저녁에는 춤꾼이 되어 우리 앞에 섰다. 고성오광대 살림꾼 머털도사 황종욱 선생의 도제식(?) 교육방식에 따라 일단 자리를 정돈한 후, 보존회장 이윤석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위에 설명한 탈춤의 종류와 명칭, 탈춤의 특징에 이어 고성오광대의 다섯과장(①제 1과장 : 문둥북춤, ②제2과장 : 오광대놀이 ③제 3과장 : 비비과장,④제 4과장:승무과장, ⑤ 제밀주 과장)을 훑었다. 이처럼 '오광대'라는 이름의 뜻은 다섯마당(오과장)으로 놀아지기 때문으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방위(五方)를 상징하는 다섯 광대가 나와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을 빌어준다.
칠순이 넘으신 허종원 선생이 보여준 제 1과장 문둥북춤은, 나환자촌에서 항의를 받기도 했으나 내용인즉 문둥이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의지를 담고 있기에 오늘날 지체장애인들도 자신의 외형적 장애를 극복하자는 의지로 해석해주길 바란단다. 제 2과장에서 보여준 말뚝이춤에서 서민을 대표해서 양반을 꾸짖는 말뚝이의 역할은 다른 탈놀이와 같지만, 적어도 내가 배운 강령탈춤과는 사뭇 다르다. 막간을 이용하여 고성오광대의 춤과 노래로 태교를 했다는 초등학교 1학년 꼬마가 자신보다 긴 말채를 잡고, 놀이로 배운 말뚝이 춤을 추는 걸 보니 신기할 따름이다. 중학생 녀석들과 비교하며 넋 놓고 감탄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날 더러 춤을 추란다. 미리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모를까, 임기응변에 약한 나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박수에 보답하지 못한 점, 이 자리를 빌어 사과 드립니다.)
제 3과장은 가상동물 '비비'를 내세워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풍자하는가 하면, 제 4과장은 파계승을 풍자하면서 잘못된 종교의 개선을 담고, 제 5과장은 처첩관계에서 빚어지는 가정의 비극과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인생무상을 그린 마당이다. 이 모든 내용이 현재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진데, 우리들에게 전통문화의 모습으로만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빠르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듣기엔 대사가 직설적이지 않고 비유적이기 때문이란다.
'산 좋고 물 좋고, 어절씨구 좋∼다.' 라는 불림을 시작으로 몇 동작을 직접 배우는데, 보기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힘있고 맺고 끊음이 강한 강령탈춤의 춤사위와는 달리 어깨짓(으시개)과 베김새, 발의 디딤이 부드럽고 둥근 모양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어려웠고 결정적으로는 신명이 실리지 않은 탓이리라! 아이들의 신명에 전염되고 '얼쑤 좋다'라는 추임새로 흥을 돋우면서 고성오광대를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밤에 술 마실 적당한 가게가 없다는 것으로 고성이 작은 동네라는 것을 새삼 알게되었다.)
다음 날, 새벽일정이 없어 아침시간이 여유롭다. 식사 후 영빈관에 있는 세계 각 국의 수집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말로만 들었던 고성농요 현지 발표 공연 '영남의 들노래 한마당'을 보기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이다. 공연을 하게되는 논 주변은 입구부터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아무리 가뭄이 심하기로서니, 기우제 겸 풍년을 기원하는 서제가 1시간동안 이어진다. 구경꾼들은 주최측에서 준비한 맛깔스런 국수 한 그릇과 막걸리 한사발로 시간을 달랜다. 16년 동안 기우제를 지낸 후 반드시 비가 왔다고 하는 사회자의 호언장담에는 그저 웃을 뿐이다.(그렇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유난히 긴 듯하더니, 기어이 인명피해까지 내고 말았다. 매년 똑같은 피해가 지겨워진다.)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같은 분들이 바지단을 걷어올리고 논에 들어서면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모를 던지면서 구경꾼에게 흙탕물 세례를 하고 '모찌는 소리'에 맞춰 모를 심기 시작한다. 종아리에 묻은 흙과 손에 든 연초록의 모, 농사일에 까맣게 그을린 살과 하얀 옷깃, 그리고 내리쬐는 햇볕의 조화가 참으로 건강한 행복을 안겨주는 순간이었다. 모심기의 지루함을 잊기 위하여 주거니(주는 소리), 받거니(받는 소리)하며 부르는 민요가락에 어깨까지 절로 들썩여 진다. 조선말엽 고성들판을 지나던 경상감사의 행렬이 멈추고 농요 소리에 도취하여 촌가에서 밤을 새우며 노래를 듣고 후한 상을 내렸다는 '등지소리'는 경상도 메나리 토리의 대표적 소리란다. '점심등지소리'에서는 점심이 오지 않음을 불평하고, '저녁무렵등지소리'에서는 집생각, 님생각에 작업을 재촉하고 독려한다. 구경꾼들만 빼면 농촌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공처농요는 어딘지 모르게 상여소리를 연상시키면서도 고성농요보다 더 현장감이 있다. 소리꾼들이 전문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아서 그렇고, 논뚝에 서서 "일은 안하고, 밥만 축낸다."는 둥, "제대로 하지 않을테면 썩 나가라."는 둥, 실감나는 잔소리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달래가며 불렀던 삼삼기 노래와 물레질 노래는 아쉽게도 듣지 못하고, 아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룡을 만나러 가야했다. '밥상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혀진 상족암은 가운데 길게 뚫린 동굴과 30㎝남짓의 공룡발자국만 빼면 부안의 채석강과 다를 바가 없다. 실은 고성문화원장님이 아니었으면 무엇이 공룡발자국인지도 모를 흔적들 투성이라 아이들도 어른들도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하지만 명실상부하게 천연기념물 411호로 지정돼 있다니 공룡의 숨결이 담겨있긴 한 모양이다. 유일한 증인(日)으로서 태양이 대변이라도 하듯, 크게 해무리가 진다.
기존에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기행과는 달리, 삶과 신명이 어우러지면서 계승·보존되고 있는 고성오광대놀이와 농민요를 통해 전통예술이라는 언어가 가슴으로 와 닿는 체험을 하게 된 기행이었다. 아무쪼록 올 한해도 풍년이 들어서 농민들의 시름이 신명의 힘으로 바뀌길 바란다.
정한나도 | 전북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이리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탈춤반을 지도하는 그는 아이들에게 탈춤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이번 기행에 참가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