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 | [저널초점]
<테마기획> 일터
김회경(2004-05-23 13:42:00)
구구한 사연과 천의 삶들이 모여드는 인간시장
막노동꾼들의 일터, 그들만의 ‘섬’
전주 모래내시장 복개도로에 위치한 모 인력공사 앞, 건장한 남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하고 쓴 커피를 나눠 마시며 이른 아침부터 북적이고 있다.
하루하루 새로운 일터를 찾아 위태로이 서성이는 사람들, 그 풍경 자체로 도심 속에 표류하는 작은 섬 같다. 잘 차려입은 정장과 번듯한 자가용을 몰고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섬은 존재하되 의식 밖에 있는 낯선 곳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들처럼 예기치 않게 이 낯선 섬으로 흘러들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그래서 이 섬은 당장은 낯설다 해도, 결코 멀리 있는 섬이 아니다.
구구한 사연과 곡절을 안은 사람들, 섬 안으로 들어서자 “일터의 신성함”이나 “노동의 즐거움”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구절처럼 사치스럽고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한 김진권씨(51?가명). 쭈뼛거리며 기자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그가 “무슨 일로 왔느냐”며 취재수첩을 들여다본다.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주며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이곳에 나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딴에는 쉬운 질문부터 던진다.
“오래된 건 아니고... 한 8년 됐나봐. 지금은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고 있지만, 한때는 공직생활도 하고, 포항제철에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일했어”하며 슬며시 마스크를 벗는다. 그제서야 경계심이 조금 풀린다.
김씨는 ‘주식 투자’로 가진 걸 몽땅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1남 1녀를 둔 가장이기에 이곳을 나올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91년에 다 말아먹었어. 모아놓은 재산도 다 탕진하고 이렇게 하루살이가 돼버렸지 뭐. 후회? 뭘 그런 걸 물어... 직장 다니던 시절이 그리운 건 말도 못하지. 그래도 몸뚱이가 재산목록 1호니까 건강해야 이 일도 하거든. 어쨌든 힘이 되는 데까지는 해야지, 별수 없잖아. 다른데 알아보고는 있는데, 답이 안 나와. 현재로선 답답하고 막막할 뿐이고,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고 싶은데... 그 뿐이야.”
그는 자신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일주일을 꽉 채워 ‘차출’되어 나간다며 일상의 궁색함을 애써 덜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자주 만나느냐고 묻자, “만나기야 자주 만나지. 내가 이런 일 하는 거 다 몰라. 내가 왜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나오겠어. 내 친구들 포항제철, 광양제철 다니는데, 보면 부럽지 뭐. 속상하게 왜 자꾸 그런 걸 물어”한다.
‘왜 자꾸 그런 걸 묻느냐’고 말꼬리를 흐리는 김씨. 시름 깊은 한숨이 담배연기를 타고 흩어진다.
지난 98년 IMF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김성만씨(37?가명). S건설에서 3년동안 일하다 지금은 날품 파는 일만 하고 있다.
“일 있는 날은 좋고, 없는 날은 안 좋고. 직장생활을 했다고는 해도, 열일곱부터 줄곧 ‘노가다’ 일을 해왔어요. 목수도 하고 철근도 하고 미장도 하고 샤링, 샤시 등등 건축현장에서 필요한 일은 다 하죠, 뭐. 기본이 6만원인데, 기공(기능공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들은 8만원에서 10만원도 받고 그래요. 공치는 날은 낚시도 가고 등산도 해요.”
어릴 적부터 막노동에 잔뼈가 굵었다는 젊은 김씨는 이곳을 ‘인간 시장’이라고 했다. 사람의 노동력이 거래되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구구한 사연과 별의별 삶의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뜻이 더 강했다.
김씨와는 바늘과 실처럼 늘 짝을 이뤄 일을 하는 임창국씨(38?가명)는 봉고차 운전을 하다 1년 6개월 전부터 인력공사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나오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가정이 깨지거나 아예 결혼한 경험이 없는 ‘노총각’들이 많다. 친구 사이인 김씨와 임씨 역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들이다.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죠, 뭐. 그게 잘 안 되네요. 한달 평균 수입은 연 1200만원이나 1300만원이 될까 말까... 한달에 60~70만원 버는 공장 직원보다 못하다고 봐야 해요. 솔직히 누가 시집오려고 하겠어요. 정부가 빨리 실업자 대책을 세워줘야 돼요. 정치한다는 사람들, 정치자금 가지고 장난 안 치고 비리만 안 저질러도 우리 배 안 곯고 살 수 있다니까요.” 김씨와 임씨가 똑같이 강조한 말이다.
“오늘은 공치고 말겠네”하며 연신 담배만 피워대던 김씨와 임씨는 몇날 며칠을 들어도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한 자신들의 삶을 다 풀어낼 수 없을 거라면서 어지간히 포를 떨더니, 인력공사에서 호명을 하자 인사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사라진다.
“결혼 상대자가 안 생긴다”고 옆에서 같이 푸념하던 또 한명의 노총각 김창우(43?가명)씨, 올해로 7년째 인력공사를 드나들고 있다. 그는 큰 형님이 식당을 한다고 무주에 있는 땅을 팔아 모두 탕진한 뒤로는 고향에도 비빌 언덕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사는 게 낙이 없잖아요. 속상할 때가 너무 많죠. 그래도 나는 노동일밖에 못해요. 나도 열여덟부터 날품 팔면서 살았거든요. 어제는 공쳤는데, 오늘은 나갈 수 있을 것 같네요.”모래내 복개도로에 있는 이 인력공사는 전주에서도 꽤 규모가 큰 곳이다. 몇 년 전에는 하루에도 수백명씩 불려 나가곤 했는데, 지금은 50명~100명 정도가 일을 나간다고 한다. 인력공사 안팎으로 100여명의 인부들이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공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일감이 없는 장마철이나 겨울은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절이다. 이들은 그때가 “동전 몇 푼이 아쉬운 때”라고 털어놓았다.
30대부터 50대가 가장 많지만, 60대나 70대 노인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씨(65) 할아버지는 어떤 질문에도 “귀찮다”며 기자를 피해 다녔다.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은 아예 팔을 괴고서 얼굴조차 마주하려 들지 않았다. 젊은 김씨는 “저 사람들 사연 다 들으려면 몇 달을 들어도 다 못 들을 것”이라면서 “다들 자존심이 있고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꺼내기도 싫은 이야기를 뭣하러 하겠느냐”며 퉁을 줬다.
이들에게 일터는 “착잡”하거나 “어쩔 수 없는” 공간이다. 하루하루 달라질 일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나 상처는 어김없이 반복되고, 쓴 커피 한잔을 홀짝이며 매일매일 그 사실을 곱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터가 안겨주는 소속감과 안정감이야말로 경제적 소득 못지않은 중요한 자기 존재의 확인지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한 불안정이야말로 이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적이다.
몸으로 날품을 파는 이들에게 하루하루 가변적으로 주어지는 일터는 절박한 생존싸움을 벌이는 또 하나의 전쟁터다. 이들이 특기와 분야를 나눠 몇 명씩 자체적으로 팀을 꾸리는 것은 각개약진할 수밖에 없는 날품 현장에서 나름의 경쟁력을 얻기 위한 ‘조직화’의 노력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날은 그 조직 내부에서도 누군가는 일을 맡고, 누군가는 빈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하루의 절박한 생존을 앞에서 그 어느 일터보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직업이 한 개인의 사회적인 위치를 가늠하는 ‘계급’으로 작용하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 막노동꾼들이 보여줬던 폐쇄성이나 경계심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점잖게 직업이 자기실현이나 성취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생존을 위한 절박함’으로 전쟁하듯 하루하루 일터를 찾아가는 이들의 박탈감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한때 공직생활을 했다던 김씨는 맨홀 안에서 가스 중독으로 사선을 넘나들었고, 공사현장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고 했다. “어떻게든 발버둥쳐도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며 “아이들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라면서 이 사회에서 소외당하거나 추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에게 일터는 야생 정글과 같은 생존의 사냥터다. 우리 사회의 시선이 진정으로 그들의 일터를 존중하고 그들의 노동을 정직하고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면, 그들이 굳이 가명을 쓰거나 마스크나 모자로 자신을 감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일터 그대로의 야생성이나 정직함을 받아들이기엔 우리 사회는 아직 ‘오만과 편견’, 위선의 허울을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