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테마기획> 장날 묵은 길, 간다
장창영 시인(2004-04-20 16:26:14)
도회지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장이란 낯선 풍물 같은 것이다. 그것도 그냥 낯설지는 않고, 오래 머물러도 영 낯설기만한 그런 어색함이 배어 있다. 설령 그 속에 몸을 담갔다가도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이내 떨거지처럼 쓸려 나오기 마련인 그런 고약함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김주영의 <객주>에 나오는 사내들의 거친 입담과 그들의 몸내를 떠올릴 때면 반갑기보다는 지레 주눅이 들곤 했다.
가끔씩 나는 시골이나 장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시골에서 자란 이들에 대해 열등감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글쓰는 입장에서 시골에서 자라지 못하고 도회지에서 그 출발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항상 지독한 자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만약 내게 외가라도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열패감으로부터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덕분에 나에게 장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란 영,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장을 떠올릴 때마다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없으면서 길을 잃어버려 미아가 된 듯한 느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장이 친근하지 않고, 가끔 먼 기억 속에 묻어둔 아련한 추억처럼,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잘못 전해진 편지처럼 한없이 낯설어지는 지도 모른다.
한때는 한반도 곳곳에 넘쳐나던 장이 이제는 약발이 먹히지 않아서인지 손으로 그 수를 헤아릴 정도이다. 어느새 그곳을 찾는 이들도 장날의 기억처럼 하얗게 늙어버린지 오래다. 웬만한 시골에도 차가 보급되어 다들 도회로 가서 장을 보는 세상이니, 장이 갖고 있던 그 독특하고 신비롭던 마력은 지금은 누구네 주름진 기억틈에 끼어 있는 것인지. 그에 따라 희미한 사진 속에 웃고 있는 이빨 빠진 노인네의 손등처럼 우리들 기억도 어느새 빛이 바래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린시절을 시장통에서 자란 나로서는 장보다는 시장이란 말이 더 친근하다. 어린 시절 시장은 내 놀이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이니 그러고 보면 그이도 참 많이 늙긴 늙었다. 예의 그 특유의 왁자지껄함도 잃어버린 채 예전처럼 편안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거기 도시 한 귀퉁이에 듬직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시장 구석 미로처럼 얽혀있던 길을 지나다보면 그 길은 또 어찌나 그렇게 비슷하게만 보이던지. 아무튼 그 길을 넘나들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시장이란 말이 갖는 의미가 장보다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의 웃음과 울음, 그리고 한숨을 온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리라. 그냥 스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이들은 모를 비밀이 있다. 한겨울 새벽 칼바람을 온 몸으로 이고 지고 나르던 그들의 서럽던 젊은 날들을, 그리고 자기 점포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팽개쳐야 했던 그 심정을, 부모 곁에서 식은 밥을 꿀떡, 꿀떡 삼켜야만했던 그들의 어린 자식들의 마음을.
그 자리를 떠나온 이들도 이제는 뼈저리게 알게다. 등시렸던 그 시절이 그렇게 서럽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지금껏 살아오게 만들었던 힘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