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와사람]
우리 들꽃의 매력에 흠뻑 취한 사람들
최정학(2004-04-20 16:24:30)
우리 꽃은 우리가 지킨다 ‘정읍들꽃사랑 연구회’
'미스김 라일락'을 아시나요?
수년 전부터 낯선 이름의 신품종 하나가 세계 화훼시장에서 일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스김 라일락’이라는 꽃이다. 처음 꽃봉오리가 맺힐 때는 진보라색을 띠다가 봉오리가
열리면서 옅은 라벤더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만개하면 강렬한 향기를 내며 백옥
같은 하얀색으로 다시 변신한다. 그야말로 라일락의 여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스김 라일락’은 ‘미스김’이라는 한국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에도 불구하
고 미국인 식물학자가 개발한 꽃이다. 1947년 우리나라 북한산의 대표적 자생식물인 털개
화나무의 씨앗을 받아가 육종해냈다고 한다. 한간에는 그가 이 기막힌 라일락을 개발해놓
고 이름을 고심하던 끝에, 한국에서 자신을 보조해주던 ‘미스김’에 착안해 지었다는 가슴아픈(
?) 설(說)도 들린다.
어찌됐건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 자생초를 돈주고 수입하는 실정에 있고, 이는 비단 ‘미스김
라일락’ 뿐만이 아니다. 백합도 원래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생초인 ‘나리꽃’이 그 모태가 되
었고, 팬지는 ‘제비꽃’을 육종하여 탄생한 꽃이다. 놀랍게도 카네이션 또한 우리나라 야생초
인 패랭이가 그 원종(元宗)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탈 받거나, 화려한 서양꽃에 밀려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의 들꽃을 찾는 사람
들이 있다. ‘정읍 들꽃 사랑 연구회’(회장 채형순) 사람들이 바로 그들. 오래 전부터 들꽃
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만나던 이들이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들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모임을 결성한 것이 지난 2001년 1월. 그동안 정읍의 산이며 들은 물론 변산 등 인근 지
역을 직접 찾아다니며 우리 들꽃에 대한 조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마침 3월 16일, 그들의 모임을 찾아보았다.
본격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한지 3년 째, 현재는 14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녹차나무를
재배하는 사람, 야생화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 초등학교 선생님, 우체국장, 농업기술센타
직원 등 순수하게 들꽃이 좋아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에서부터 들꽃을 전문적으로 연
구하고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들꽃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직업만큼이나 제각각이다.
모임 중에서도 거의 막내 축에 속하는 이승향(영원우체국장)씨가 들꽃과 인연을 맺게 된 계
기는 더욱 특이하다. “나비를 키웠어요. 나비는 꿀을 먹고사는데, 그냥 주면 안 먹거든요. 꼭
꽃에다가 발라줘야 먹어요. 그래서 들꽃을 따러 다녔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들꽃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닭았어요.” 이씨는 그 뒤로 작은 들꽃을 보기 위해 돋보기를 들
고 다닐 만큼 들꽃에 매료 됐다고 한다.
고창에서 녹차나무를 재배하는 김경덕씨도 이씨와 비슷한 경우다. 들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하는 그는 “한참 몸이 안 좋아서 산에 꾸준히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산길 옆에 피어있는 들꽃에 관심 갖게 됐죠. 그 뒤로 하우스에 들꽃 몇 그루 심어놓
고 아침마다 얼마나 컸는지 보고 잡초도 뽑아주고 하는데, 그 시간에 제일 편하고 좋아요”
라며 들꽃도 항상 옆에서 바라봐 주고 가꿔줄 때 잘 자라지, 심어만 놓고 그냥 내버려두
면 죽어버린다고 말한다. 들꽃도 사람과 같이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들만의 들꽃 사랑법
이렇게 제각각의 이유로 들꽃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은 한 달에 한번씩 산으로 들로 들꽃
탐사에 나선다. 이를테면 우리지역 들꽃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고 다니는 셈이다. 이들의
주무대는 내장산 일대와 변산 등 정읍 주변 지역. 들꽃을 찾아 이산 저산 다니다보니 재
미있는 일도, 억울한(?)일도 많이 겪었다.
“들꽃을 찾기 위해서는 주로 높은 산을 많이 다녀요. 아무래도 높은 산에 이제는 희귀해져
버린 우리 야생초가 많이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산마다 거의 약초를 많이 심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고 산에 올랐다가 약초도둑으로 몰려 쫓겨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들
꽃사랑연구회의 총무를 맞고 있는 이용환씨의 설명이다. 그래도 들꽃에 대한 연구를 중단할
수 없이 몰래 숨어 들어가 조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들이 얻은 소득은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
생초이지만 정읍지역에는 분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개구리발톱, 층꽃, 앵초 같은
야생초들을 발견했고 노란무늬 붓꽃, 금붓꽃, 얼래지 꼬마은란초, 사철난, 두루미 천남성
등의 군락지도 발견했다. 한결같이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대표적인 특산식물들이다.
“지금 우리 산하는 급격히 종으로 뒤덮히고 있어요. 외래종은 번식력과 생존력이 아주 강하
거든요. 이런 외래종의 득세로 우리 야생초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죠. 3년 전 우리
자생초 군락지가 있던 곳에 올해 가보면 이미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용환 총무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미 네델란드 같은 경우는 외래종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고, 우
리지역에도 몇몇 뜻 있는 분들이 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들꽃을 위협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난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
요즘도 우리 지역에는 주말만 되면 서울이나 대전 같은 대도시에서 온 관광버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춘란을 캐러온 사람들이다.
“춘란은 전라남북도, 충청도와 경상도 일부에서만 서식해요. 기온이 낮은 윗지방에서는 자라
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대도시에서 관광버스 채 춘란 캐러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
마추어에요. 그래서 좀 이쁘다 싶으면 배낭에 아예 싹쓸이를 해가 버리는 거죠. 진짜 전문
가들은 야생초가 아름다운 것도 알지만, 또 그만큼 귀하다는 것도 알아서 그렇게 싹쓸이하
지는 않거든요” 들꽃사랑연구회의 터주대감이자 고문역할을 하고 있는 박영만씨의 설명이
다. 그런 사람들을 몇 번 고발도 해봤지만, 여전히 그런 행태는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아주 귀한 야생초 군락지를 발견해도 절대 장소를 누설하는 법이 없다. 야생
초에 대한 이들의 사랑법이자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다. 어디에 야생초 군락지가 있다더라
하는 언론보도가 나가면, 그곳이 초토화되는 것은 불과 몇 달도 걸리지 않다는 것을 알
기 때문이다. 들꽃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임이 결성된 200
1년부터 꾸준히 들꽃 전시회를 펼쳐오고 있다. 특히 작년 5월 동학농민혁명문화제기간 황
토현 교육관에서 열렸던 회원전은 이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다. 이들
은 앞으로도 이런 전시회를 꾸준히 가져 우리 들꽃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알리겠다고 한다.
화려한 서양꽃에 밀려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 들꽃. 하지만 이들이 있는 한
도심의 화단에서 팬지나 사루비아 대신 제비꽃이나 복수초 같은 우리 야생초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느낄 수 있을 날이 곧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