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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문화비평]
<손영미의 문화비평>
손영미(2004-04-20 16:23:32)
인스턴트 아닌가, 천년의 사랑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사랑론 On Love』 (1993)의 첫 장 「낭만적 숙명론」에서, "내 영혼 깊은 곳을 헤아리지 못 하는 인간과 한 침대를 쓸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적인 연인과 만나는 걸 꿈꾸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냐"고 물으면서, 우리는 삶의 어떤 측면보다 사랑에 있어 운명의 작용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인연에 대한 이런 믿음은 요즘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일찍이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드미 무어 주연의 "사랑과 영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러브 스토리들이 '너는 나의 반쪽이었음에 틀림없다'라든가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식의 논리로 주인공들의 행동을 설명 또는 합리화해 왔고, 독자들은 거역할 수 없어 보이는 그 필연의 작용에 매혹된 채 연인들과 더불어 울고 웃고 해 온 것이다. 그런 운명적인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시간성(無時間性)이다. 사고로 죽은 애인이 자기 반 학생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 백제 때 요절한 두 남녀가 1800년 후인 21세기에 되살아나기도 하고 (SBS 드라마 『천년지애』), 천년 전에 죽은 연인들이 현대에 다시 나타나 해묵은 삼각 관계를 재현하기도 하고 (영화 『은행나무 침대』), 처음 만난 남자가, "이토록 간절히 그리운 사랑이 우연이라면 당신인들 납득하겠습니까... 그렇게 되어지도록 아주 오랜 시간 저편에서부터, 천년도 넘는 저쪽의 먼먼 옛날부터 진행되어 온 일입니다"라고 (양귀자, 『천년의 사랑』 하권 103) 주장하며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여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는 것이 이런 작품들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요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에서는 둘 중 하나가 죽더라도 자신들의 사랑은 하늘에서 이어지고 커질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경호, 1998). 그렇다면 이런 사랑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물론 시간성 자체가 별로 문제되지 않는 셈이다. 그들에게는 공간 역시 장애가 되지 않는다. SF 판타지 『황하 War and Love』의 주인공들은 서기전 2770년의 황하로부터 오늘날의 한국으로 배경을 옮겨다니며 사랑을 나누고, 만화 『천년 사랑 아카시아』(김동화, 1998-2001)의 연인들은 고대 이집트 및 리비아에서 현대 한국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간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해 진행되는 운명적 사랑은 당연히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 『천년의 사랑』에서 진우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상권 197) 말하고 있고, 『번지 점프』에서 인우는 전생의 연인 태희/현수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가족과 현세를 버리고 내세로 뛰어든다. 이렇게 최근 우리를 매료시켜 온 '천년의 사랑'은 전생의 인연을 위해 모든 것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감내하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개념인 바, 발 빠른 상인들은 당연히 이를 마케팅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천년 반지, 천년 사랑 아파트 (부산 부곡동), 온라인 중매 회사 (www.1000-love.com) 등 '천년의 사랑'을 내세운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고, 심지어는 개인들의 구애 블로그까지 이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만나서 백일간만 안 헤어져도 기념식을 하는 이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천년을 변치 않을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이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 같이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동성애 모티브를 이용해 화제를 모은 『번지 점프』의 경우,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다루었으니 그쯤은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고, 양귀자의 소설 역시 서구의 실증주의적 논리를 뛰어넘는 동양적 사고와 사랑의 방식을 그렸다는 이유로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혼율이 세계 2위, 아시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보육원 및 공부방 이용 아동의 대다수가 결손 가정 출신이고, 무려 100만 명의 아이들이 가정 해체로 인해 빈곤층으로 전락해 있는 이 나라에서 '천년의 사랑'은 왜 그리 인기인가?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영원한 사랑이 자라날 수 있는가? 문제는 바로 거기 있는 것 같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변치 않는 애정이 존재하기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소망은 오히려 더 간절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불교의 윤회 사상, 기독교의 내세관, 유난히 요란했던 밀레니엄 행사 등을 통해 '천년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싹트고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너무도 확실히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명사적 원인도 간과할 수 없다. 극소수 특권층을 제외하면, 대다수 인류는 노동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간단한 손짓 하나로 많은 것을 해결하고, 돈만 내면 발리 같은 외국 휴양지에서도 집사 딸린 빌라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천년의 사랑'은 이런 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꽃집에서 돈 몇 푼으로 누군가가 수십 년 기른 분재를 사고, 신용카드 한 장으로 안락한 빌라를 빌려 쓸 수 있듯이, '천년의 사랑'은 모든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개념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벽하게, 영원히 사랑해 주라'는 게 그 욕망의 내용이고, 이런 욕심을 위한 변명은 딱 하나다. (겉으로는, '나는 전생에, 또는 천년 전에 네 연인이었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은) '나는 나니까.' 이렇게 '천년의 사랑'은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우리 세대의 인스턴트 사랑인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극히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트렌드의 가장 성공적인 예인 양귀자의 소설에는, "하기야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라는 (상권 123) 구절이 나온다. 며칠 전에 만난 이와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해 받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을 주고받고 싶은 욕심, 나의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온 그 쪽의 시간을 일시에 점거하여, 같은 시간을 흘러가고 싶다는 이 터무니없는 욕망은 상대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지나치게 과격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차이와 간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 유아적인 고집과 갈망은 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한 폭탄인 것이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는, "타자성은 . . . 동시성(同時性)과 전반대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101), "사랑이 감동적인 것은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이 존재자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 사실 자체로 타자성을 마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성을 보존한다"는 (104) 구절이 나온다.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살아온 미지의 시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치고, 내 것과 다른 속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대방의 현재와 미래를 조금이나마 알려고 애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진대, '천년의 사랑'은 전제 자체가 그것을 부인한다. 농사를 짓듯이 정성껏 키워 가는 사랑, 나무의 충실한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그 변모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용기를 얻어 내가 자라듯이, 그렇게 끈기 있고, 착실하고, 더딘 사랑이 참된 사랑 아닐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을 기르는 게 조국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투자가 아닐까? 사방에 점점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이 봄날 오후 어디선가 그런 사랑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어여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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