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자베르 경감의 아리아, 그 서늘한 깨달음
서석희 신부·가톨릭 전주교구 홍보국장(2004-04-20 16:21:38)
1. 한번 물었다하면 끝가지 놓지 않고 늘어지는 충견과도 같은 사람이 있다. 한번 방향을 잡으면 궤도를 수정함이 없이 빈틈없이 그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한번 '맞다'라고 생각하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끝가지 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처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 초지일관, 포기하지 않는 그 불굴의 용기에 우리는 감탄하고, 또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막상 그를 대하면 왠지 모르게 두려워지고 숨통이 죄여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아니 그가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매일매일 대하게 되는 "일상"이라고 했을 때, 바로 그 일상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는 원칙과 규율로 우리를 포위하듯 다가올 때, "마땅히 그래져야 된다."는 그 정의에 근거한 원칙과 규율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 굴레 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히고 벗어나고픈 마음이 되어지는 것은 무엇일가를 생각해본다. 그는 또 "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모르는 구석까지 낱낱이 동영상 카메라에 기록하면서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견고한 자세로 우리를 탄핵시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을 상상해 보라. "살아가는 것이 죄다."라고 가끔 푸념하는 우리에겐 두렵고 떨리는 신일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것은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라며 발버둥쳐도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아니 변명 자체가 통하지 않는 "냉혹함"과 "준엄한 심판"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2.프랑스의 문호, 빅톨 위고의 원작 <레미제라블>, 이미 소설로, 영화로, 뮤지컬로 옮겨지고 수많은 배우의 모습을 통해 표현되고 각색되어져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우리 곁을 맴도는 그 매력은 바로 우리가 고민하는 "정의와 자비의 갈등"을 심도 있게,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통해 감동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려다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을 비롯해서, 도둑질한 그를 오히려 감싸는 가톨릭 신부, 그로 인해 새 삶을 걷고 성공하는 장발장, 그러나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쫓아다니는 자베르라는 경감, 그리고 계속해서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와중에서도 그들의 등을 치고 손가락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 보이며, 우리에게 정의의 끝과 자비의 끝이 어디인지를 묻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라는 경감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초지일관의 사람이다. 그는 그 자신 스스로 규율과 질서를 수호하고 "마땅히 되어져야 한다."는 법과 정의를 숭배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게 붙잡혀서 자신에게, 그리고 신에게 자비를 비는 범죄자 앞에서 "말을 아끼고 눈물을 아껴라, 정직함만이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충고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철학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별'이란 아리아이다. 그가 장발장을 쫓으면서 신에게 기도하는 아리아이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셀 수도 없지만
어둠을 질서와 빛으로 채우고 있네.
별들은 파수병 조용해지면 충실하네.
밤을 지키는 파수꾼 하늘은 제 위치에 있으며 경로와 목적지를 안다네.
계절 따라 돌고 돈다네.
항상 같은 길로 ......."
(묘하게도 자베르 경감의 냉혹한 모습과는 달리 이 뮤지컬 아리아는 내용이 시적이고 곡 또한 명곡이다.)
3.이렇게 자신을 어둠 속에서 질서와 빛을 채우는 별로 묘사하며 반드시 장발장을 잡게 해달라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소명이기에 신이 자신을 도와주실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자신에게는 뿌듯한 모습이었겠지만, 비쳐지는 그의 모습은 집요하고 냉혹하게 보인다. 그러나 장발장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죽을 위험에서 오히려 자신을 구해준 장발장의 전혀 예기치 않은 반응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그 혼란을 주체하지 못하고 파리의 세느강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장발장의 사랑과 자비의 힘을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경직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은 정의로웠지만 죄의 결과에 집착했지 그 죄의 원인을 간과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4. "남을 단죄하는 사람들", 온 나라가 "단죄 신드롬"에 빠져있다. 범과 질서라는 명분 아래 모두들 한마디씩 그 탓을 돌리고 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들의 역할을 꼬집듯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있고,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나'가 없고 '우리'가 없다. '그'와 '그들'만이 있을 뿐이다. 성서에 보면 간음하다 걸린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온 남자들이 있었다. 자기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분과 분노에 휩싸여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왔다. 치욕과 부끄러움에 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땅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예수를 향해 그녀의 죄에 대한 심판을 종용한다. 어느 누구도 그 여인과 간음한 남자의 행방에 대해서 묻는 자는 없다. 모두들 여인을 돌로 치라는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예기치 않은 말에 그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자 한참 후에 "인생에는 여러 가지 변명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오랫동안의 경륜에 의해 체험했던 노인들부터 서서히 그 자리를 물러났던 것이다. 가끔 자베르 경감의 아리아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나는 원칙과 법에 충실하게 산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마치도 우리 소설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사감선생님처럼 위선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자꾸만 주어들은 원칙과 정의로 남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단죄하면서 경직되어 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자베르 경감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그 멜로디가 주는 아름다움과 그 가사 내용이 주는 냉혹함을 상반되게 느끼면서 정의와 자비라는 이 뜨거운 인생의 테마를 오늘도 안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