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태극기에 가려진 두 편의 영화
신귀백(2004-04-20 16:20:44)
생중계의 느낌을 주는 핸드 헬드는 영화문법의 기초 테크닉이다. 그러나 심했다. 카메라에는 잠수함에서 사용된 균형추가 있어서 일부러 흔들지 않고서는 수평이 흐트러지지 않는데 말이다. 총알이 귀때기를 스치는 공들인 전투장면은 일찍이 없던 신기원이었지만 화면을 지나치게 흔들어 대는 바람에 비극에 침잠해야 할 감정이입이 안 되 참 많이 거슬렸다. 거기다 원빈의 학예회식 발성, 깨꽃이나 메밀밭의 롱 테이크 한 장 없는 영화 태극기가 천만 명이라니, 대단하다, 우리영화. 이 양적 발전은 어디서 오는가. 아마도 <말죽거리 잔혹사>를 거친 지방의 아저씨들이 극장 문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태극기는 조국애라는 대의 아닌 형제애라는 어깨에 힘을 뺀 전술로 하여 대중에게 어필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카인과 아벨의 신화에 익숙한 내겐 형제애는 강박증이요 희망사항으로 읽힌다. 월급쟁이 형님이 두 번째 보증을 안 서 줘 우는 동생들이 하나 둘 아닐텐데 말이다.
<콜드 마운틴>은 남북전쟁을 다룬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서북청년단이나 보도연맹의 만행에도 목선이 고운 니콜 키드먼이 영혼의 고귀를 지키는 기다림의 이야기다. 태극기에 가려져 식어버린 이 미국영화는 '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처절함과 밭을 일구며 등불을 켜는 여인의 애절한 서사가 빼어난 배경이 만드는 서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만리 길을 나르느라 깃이 너덜너덜해진 도요새의 날개 같은 한 남자의 귀향을 보면서 태극기의 단순명료함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야생동물 장동건의 집착에는 수컷의 용맹함과 무모한 형제애만 있을 뿐 사실혼 관계에 있던 이은주를 위한 귀향의 자세가 없다. 전쟁의 길 끝에는 남자들이 돌아갈 집과 여인이 있는 법일텐데 말이다. 반전(反戰)이나 평화를 욕심내지는 못할망정, 세상의 구원은 여성적인 것 그리고 등불이 걸린 작은 창에 있다는 것을 똑똑한 강재규가 정말 모를까.
또 한 편. 한국영화 때문에 버려진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것들>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쾌활한 노년의 진정한 사랑 찾기를 그리고 있다. 이 빼어난 제목의 영화에는 청년의 사랑과 다를 바 없는 설레임 뒤의 환희, 흔들림과 후회, 포기와 원망, 그리고 늦은 참회와 깨달음 등이 유쾌하게 버무려져 있다. 이 다양한 감정 뒤에 숨어있는 노년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관류하는 감독의 깊이와 표현의 능숙함에 한 장면 한 장면이 즐겁고 행복해서 늙어도 좋을 듯했다. 다신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눈물 흘릴 사랑이 외롭던 날들에 대한 보상처럼 찾아온다면 우리는 조용히 늙으며 그 사랑을 기다려도 좋지 않을까. 사랑이 어찌 자동차처럼 년식이 중요하겠냐는 메시지는 영화 <죽어도 좋아>를 생각케 했다. 그러나 박진표의 영화는 노년에도 성은 있다, 를 넘어서지 못한다. 너무도 간단한 소통이고 무엇보다도 견뎌온 시간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다. 들인 돈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그리고 명성과 부가 축적된 사람들의 호사스런 이야기가 어찌 대중의 이야기가 되겠냐는 것을.
이제 나도 반환점을 돌았다. 하다보니, 노인이 잡는 고기는 감동스럽다. 티나 터너나 오노 요코는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지만 건장한 현역 아니던가. 얼마 전 쌍둥이를 낳은 알파치노, 드럼을 치던 고 흑우 김대환 선생, 거시기에다 글 쓰는 것 빼고는 책 볼 줄 아는 조영남을 보면 주름살이 상처 아닌 훈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늙을수록 뭘 배운다는 것 또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이기에. 하여, 묻는다. 오십에 등단한 소설가 김훈의 <화장>처럼 초로의 쓸쓸함과 상처 그리고 숨쉬기 어려운 짝사랑을 견디는 섬세함을 그려낼 감독은 없는가를.
천만이란 파시즘적 숫자는 스크린쿼터라는 물산장려 운동에 힘입은 바 없지 않을 것이다. 이제 파이도 적당히 키워진 마당에 신토불이는 추억의 유행가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 믿기에 기타노 다케시나 라스 폰 트리에 또 쿠엔틴 타란티노도 태극기와 함께 깃발을 펄럭이길 바래본다. 선댄스가 김동원을, 베를린이 김기덕의 깃발을 세워 준 것처럼 말이다. 남의 것에 너그럽고 내 것에 대한 꼬장꼬장함에 속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양적 발전이 질적 진화를 낳는다는 선현의 말씀을 믿고 싶은 오늘, 오래 단련한 금덩이 <송환>을 보고 와서, 나는 운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