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화가의 산 이야기>
이상조(2004-04-20 16:10:54)
하늘을 오르는 영혼들
어머니를 잃은 후 이부자리를 걷어 치웠다. 대학 입학 후, 어머니를 떠났기에 더욱 회한이 깊었다. 나의 그것들은 단 한 장의 100리터 쓰레기 봉투에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인간의 안락함의 부피가 얼마나 과장되어 있는가를 그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장으로 옮기며 느낄 수 있었다. 그 편안함의 무게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거짓을 보태면 놀랍게도 새끼손가락만으로도 그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음만은 조금 무거웠었는데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 날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비 맞을 이부자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는 내 어릴 적,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꾸리던 배낭 옆에서 항상 눈물짓던 그 어머니의 슬픔을 아직도 헤아릴 수 없는 내 육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쌀과 고추장과 김치를 들고 내 배낭 싸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그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할 수 있지만 그 어머니의 슬픔은 알 수 없었던 내 우둔함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 때 나는 지나치게 많은 쌀과 고추장과 김치를 담아가라는 어머니의 그 큰손에 질려, 그 깊고 큰사랑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진저리만 치고 있던 나의 작은 방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 때 꾸리던 배낭이 어머니의 생각에는 어떤 것이었을까? 혹시 내 즐거움 속에서 현실을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보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 내 어머니의 슬픔을 알 수 없었듯 지금도 어머니를 잃었다는 슬픔은 전혀 느낄 수 없다. 나는 단지 건강하시던 어머니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내 기억단자에는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직도 없다. 슬픈 기억이 없으면 눈물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나는 울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여인을 알고 있다. 내가 혼자 남았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소식을 그 여인에게 전했다. 전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침묵의 저편에는 흐른 세월과 뒤엉킨 어떤 의미가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여인이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의문만 거듭 되 뇌이고 있다. 얇은 수건만을 덮고 바닥에 누워도 깊은 잠에 드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비 내리는 지붕에나 누워야 슬픔에 잠길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눈 아래 누워있다. 그 눈을 헤집고 들어가도 아픈 기색이 없을 어머니의 미소 아래 누워 있다. 나는 눈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멍청하게도 어머니의 그 아름답고 포근하던 미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 글을 쓴 후에나 그 빈자리에 쏟아 부을 눈물이라도 터질까?..
1998년 9월 29일 아침에 산 후배의 전화가 있었다. 그 아침, 연구실에 들어가려고 문에 열쇠를 꽂고 있던 참이었는데 문 밖으로까지 전화벨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왠지 그 전화를 받기 싫었다. 벨소리가 끊기기를 기다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창문을 통해 보이는 모악산의 넉넉함을 느끼기도 전에 전화벨 소리는 다시 울렸다. 지금도 그 날의 전화벨 소리는 숨가쁘다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형, 원정 간 아이들...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요... 확인해 보세요"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이라 벽과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콘크리트의 독한 냄새를 견딜 수가 없었다.
"오... 하느님..!."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책상을 가로질러 내 쪽으로 느리게 기어오고 있었다.
1998년 한국 경기북부 구조대 탈레이사가르 원정대의 고 신상만, 고 최승철, 고 김형진의 사고 소식이 내게 전해져 오는 순간이었다.
1997년 여름 파키스탄의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 원정 등반을 성공하고 돌아 온 우리는, 다시 5년 동안 매년 한 곳씩 다섯 군데로 원정을 다녀 올 것을 계획하였다. 그 다섯 곳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르기 어렵다고 손꼽는 곳이거나 아니면 접근하기조차 무척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런 곳을 오르고 싶어하던 그들을 계획 첫 해에 잃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빈틈없이 준비하고 냉철하게 등반하던 그들이었기에 정말 어처구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정 기간의 대부분이 방학 기간이 아닌 이유로 같이 원정을 떠나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들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어 아직도 마음이 무척 무겁다.
"형! 잘 다녀올게요, 재미있게 등반하세요..."
그들이 인도로 떠나던 날 나는 몇 명의 후배와 설악에 있었다. 삼지 바윗길(설악산의 장수대와 한계령 사이에 있는 바위 능선. 바위 봉우리 하나가 부처님의 손바닥과 같은 모양이다.) 첫 피치에 붙어 고 김형진의 출국 인사를 모바일을 통해 받았다.
"잘 다녀와... 안전 등반하구... 돌아와서 찐하게 한잔하자!..."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굳이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그 만큼 높이 올라와 있었다. 한계령을 힘겹게 오르는 차 소리만 조그맣게 바람결에 들려오는 아주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래, 잘 다녀와라...성공하길 빌게... 새끼들 좋겠다...자, 이제 올라가자..."
혼자 소릴 하면서도 흰 산에서 원도 없이 등반할 그들이 부러웠다.
"...자일에 묶인 정, 바위를 오르며, 구름 위에 내 살집을 짓고... 우리는 간다, 저 높은 산에..."
목청 높여 노래 부르며 몇 동작을 오르는데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에서 듣는 빗방울이라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이 검게 변하고 폭우로 변한 비는 30분이 지나도록 그칠 기미가 없었다. 후딱 정신이 들었다. 이곳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지나온 계곡은 원시 그대로였다. 이런 상태로 조금 더 지나면 계곡은 물로 넘칠 것이고 언제 그칠지 모르는 폭우를 맞으며 바위에 매달려 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 분명했다. 여름의 설악에서, 폭우 속에서 판단을 잘못해 일어난 조난 사고는 수 없이 많았다. 몇 개의 대표적인 사고는 사례연구를 통해 지도처럼 상세하게 우리 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탈출하려면 지금이었다. 탈출을 결정했다. 이른 아침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던 곳을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넘치는 물과 흐르는 돌과 미끄러운 바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 우리가 안전하게 한계령 오르는 도로 위에 내려섰을 때, 우리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 장대비는 그러고도 4시간이나 더 쏟아졌다. 물이 설악에 흘러 넘쳤다. 모든 것이 젖었지만 산을 향한 우리의 열정까지 적실 수는 없었고 우리는 즐거웠다. 몇 시간 동안의 고생은 산에서 가끔 겪는 그런 어려움으로 치부하며 대낮부터 흥겹게 술타령으로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그 날의 그 빗속에, 가능한 한 언제 어디서라도 서로를 연결하려 했던 그들과의 끈끈한 인연을 끊는 잔혹한 의식이 숨겨져 있었으나 우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흐르는 인더스 강물 위에다 그들의 넋을 위해 작은 꽃배를 흘려 보내고 있을 내 운명이 그 날의 그 빗속에 숨겨져 있으리라고 더 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비가 우리가 원하는 데로 언제든지 내릴 수 없듯 인연도 언제든지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