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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교사일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전주덕진초등학교 교사 김은실(2004-04-20 16:09:15)
항상 신학년도가 시작되면 우리 교사들은 긴장되기 마련이다. 새로운 아이들을 맡은 담임으로서의 각오도 다져야 하고 학교 계획에 부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3월인 요즈음은 시간을 쪼개 써야 할 만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부터 성격과 학력 실태를 대충 파악한 지난주일 어느 날 오후 이름과 얼굴을 매치 시키며 가정환경 조사서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엄마의 이름란이 공란으로 비어 있는 두 아이. 남학생 둘이서 편부 슬하에서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슴에 ‘싸아’하니 저려왔다. 엄마 사랑이 몹시도 필요할 어린 나이의 내 반 아이가...... 그러다가 내 기억은 8년 전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내가 군산 금광초등학교에 근무했을 때의 어느 날 가을의 오후 늦은 시각,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저벅 저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그 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노크 소리. “누구세요?” 내 물음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낯선 남자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들어서면서 하는 말, “여기가 대풍이네 반이죠? 대풍이 선생님이신가요?” 자리에서 일어 선 나는 그 남자 뒤에 엉거주춤 따라 와 선 대풍이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 애 얼굴. 의자를 빼어 주고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그는 덜썩 소리나게 앉더니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덥수룩한 수염과 허술하게 차려 입은 옷.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에 얹어 쓴 검정 운동모. 그리고 얼마나 마셨는지 목덜미에서 얼굴까지 온통 붉어 진 그의 취한 모습. “선생님도 짐작 하셨으리라 믿지만 제가 바로 대풍이 애비 되는 사람이올시다. 지금은 같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대풍이네 가정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별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누나랑 함께 살고 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어딘지는 모르나 혼자 살고 있음을. 그는 끊겼던 말을 다시 이었다. “선생님, 이렇게 불쑥 찾아 와서 죄송합니다. 이 애 엄마가 자꾸 이혼을 하자고 앙탈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떨어져 살고는 있지만 저는 절대로 이혼을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돈 좀 못 번다고, 술 좀 좋아한다고 이혼 사유가 됩니까? 그런데 요즈음 들어 이 놈이 자꾸 눈에 밟혀서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헛걸음 치는 셈치고 학교에 왔더니 글세 이 놈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잖아요. 그래서 온 김에 선생님 얼굴이나 뵙고 가려고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하고 말을 끝마친 그는 또 고개를 숙이곤 한 숨을 쉬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했다. 뭐라고 그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아들이 보고 싶어 찾아 온 대풍이 아버지에게 그의 가정사를 알고 있었노라고 말하기도 뭣했고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기도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그 때 저의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어쩔 줄을 모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 아버지 이제 가 봐야 해요. 할머니가 기다려요. 늦으면 혼나요.” “알았어. 임마, 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어디지? 선생님 죄송하지만 종이와 펜 좀 빌려주세요.” 하며 아들의 머리를 자꾸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건네 준 종이에 그 애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홋수를 적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 눈에 들어 온 그의 춤추는 필체. 소룡동 현대 아파트 나동 309호. 적은 종이를 소중히 접어 주머니에 넣은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교실 문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이 놈을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 먹이고 보낼 랍니다. 부탁드립니다. 공부를 안 하려고 하면 사정없이 혼내 주십시오. 그럼.” 그리고 꾸뻑 인사를 하면서 아들의 손목을 잡고 층계를 내려서는 그. 그의 구부정한 등 뒤로 어둠이 짙게 내려오고 있었다. 4년 전 이 곳 우리 학교로 전출해 오고 학급을 배정 받은 후 제일 놀란 것은 결손 가정이 많다는 것이었다. 편부, 편모가 여섯 가정, 그 중에서 사별한 경우는 두 가정이고 이혼한 가정이 네 가정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혼한 네 가정 중에서 아빠랑 살고 있는 아이가 셋, 엄마랑 살고 있는 아이가 하나였다. 자세한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대부분의 이혼 사유가 남편의 무능과 과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이들을 남편에게 떠맡기고 아내들이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없이 아빠와 살고 있는 아이들. 엄마의 손길이 한참 필요한 나이의 내 반 아이들. 그러나 내 아이들은 결손 가정의 표를 내지 않았다. 옷도 남루하지 않고 성격도 우울하지 않았다. 성적도 좋은 편이다. 여니 아이들과 비교하여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마, 아빠의 부재가 그들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지금 아이들은 영악하고 현명해서 현실에 빨리 적응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쩐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멀리 떠난 엄마가 조금도 그립지 않다는 아이, 돌아가신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다는 아이, 이들에게 ‘ 그래, 참으로 잘 한 일이다. 떠난 부모를 애달피 생각하면 뭘하냐고 맞장구 칠 수 없는 이 마음. 아이들의 그런 태도가 참으로 비정하다고 나무란다면 오히려 나무라는 내가 나쁜 것일까. 어렸을 적, 학교에 다녀와서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소리 쳐 엄마를 부르면서 집안 구석, 구석을 헤매었다. 그리고 가게라도 다녀 온 어머니를 보면 반가움에 쪼르르 달려가 매달리며 이렇게 투정 부리지 않았던가. “엄마, 어디 갔었어? 엄마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놀랐는데.” ㅜ 그러면서 그렁그렁한 눈물을 어머니의 치마폭으로 쓱쓱 닦아내지 않았던가. 엄마의 부재가 준 두려움이 싫어서 한 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 부부의 불화가 이혼을 부르고 어쩔 수 없이 양 쪽 부모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아이들. 그것도 아이들의 선택이 아닌 어른들의 결정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때 과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기 전엔 절대고 헤어져선 안 된다는 주례의 말이 아니더라도 너무나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세태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하는지 지금 대풍이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키도 마음도 훌쩍 큰 열 일곱 살의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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