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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한상봉의 시골살이]
<한상봉의 시골살이>
농부(2004-04-20 16:02:58)
스산한 봄도 있는가? 봄이 다투어 앞길을 먼저 달리고 있다. 나는 어, 봄인데, 하다가 자꾸 시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집 옆 개울가에서 동네 어느 아저씨가 나무를 베다가 그만 기계톱에 허벅지를 베었다. 그분을 모시고 안성면에 나가보았으나, 마침 일요일이라서 문을 열어놓은 의원도 없고, 무주읍까지 가서 응급처치를 하고 대전 성모병원엘 갔다. 다행히 뼈는 상하지 않고 신경도 많이 건드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거름에 집에 돌아오면서, 함께 대전에 다녀오던 마을 분에게 여쭈어 보니, 아랫마을에선 벌써 감자를 다 심었단다. 올해는 씨감자가 워낙 비싸고, 나오는 물량도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웃에서 씨감자를 구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조금 늦었지만, 밭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작년에 워낙 농사가 안 되어 올해는 예전처럼 농사에 마음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아내가 올해는 직접 농사를 좀 짓고 싶다며 봄을 기다리던 참이라, 아내의 마음에 기대어 농사를 지어볼 생각이다. 이제 아이도 많이 커서 밭에서 엄마랑 놀면 될 성싶다. 둘째형이 암으로 이승을 떠나고 난 뒤, 죽음이란 주제가 부쩍 가까이에서 서성거리고, 주변의 안타까운 지인(知人)들에게 시선이 자꾸 머문다. 농사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며 이승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애달픈 사연과 처지에 마음이 더해진다. 오늘 아침에는 이년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지금까지 간간이 만나곤 했다. 예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꽤 오래 전에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하고, 지금은 야간에 대리운전해서 근근히 연명하고 있다는 전갈이다. 항상 위태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던 친구였다. 내일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는데, 돌아오기 전에, 인천에 들러서 그 친구를 잠시라도 만나고 와야 할 모양이다. 지금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있는 예술치료의 경험이 그에게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박남준 시인은 ‘길 끝에 닿은 사람’이라는 시에서 “더러는 따뜻했어, 눈발이 그치지 않듯이 내가 잊혀졌듯이, 이미 흘러온 사람, 지난 것들은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뒤돌아보면 절뚝거리던 발걸음만이 눈 속에 묻혀 흔적 없고 문득, 나 어디에 있는가, 어쩌자고, 속절없이…”라고 썼는데, 그 친구는 지금 그 길의 끝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내게 전화를 걸러온 그 친구가 고맙다. 나는 그래도 그에게 잊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니, 안심이 된다. 다만 내가 먼저 그 이를 기억하고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깝다. 여관방에서 장기투숙하고 있는 친구, 그 쿰쿰하고 욕된 방에서 무슨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천장을 쳐다보고, 내내 ‘편안한’ 잠을 그리워했을까? 돌아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했다. 불경기에 생존이 다급해지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견디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기도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말은 여전히 힘이 없고, 물질적 조건은 빈곤하며, 영적 에너지는 갑자기 흩어져 버린다. 그래도 차분하게 차분하게 그들에게로 가 보자. 가서 보고, 그 곁에 가만히 앉아 있는 미덕이라도 간직하자. 창밖에 가득한 댓잎 사이로 햇살이 닿는가 하면, 이내 빛이 스러지고, 다시 햇살이 날아와 앉는다. /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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