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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문화저널]
<테마기획> 오락과 유희, 삶의 애환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
원용찬 전북대 경제학부 교수(2004-04-20 15:38:34)
오락과 유희, 삶의 애환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 전주 남문시장으로 허우적거리며 해장국을 먹으러가는 새벽시장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요즘에는 꼭 그렇지만 않다. 콩나물 국밥집에도 사람이 뜸하고 예전 같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국중(國中)의 시장이었으며 하멜의 표류기에서도 "(서해안의) 바다로부터 하룻길이었지만 마을이 컸고 큰 장이 서고 있었던" 전주가 도세의 격감과 더불어 쇠퇴하는 까닭도 있었겠지만 최근에 얼어붙은 경기가 시장의 활력을 모두 뺏어 버렸다. 시장은 물자만 단순히 교환되는 장소가 아니다. 서민들의 삶과 정서가 언제나 배여 있는 곳이다. 시장이 활력에 넘치면 그 만큼 지역과 나라도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게 된다. 원래 조선시대의 장시(場市, 장터)는 백성들이 이득을 얻는 데에만 눈이 어두워 농사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금하였다. 그러다가 가뭄과 흉년이 겹치면서 백성들이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시장을 비로소 허락하였던 것이다. 1473년 성종 4년의 기록에 "경인년(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저자의 점포[市鋪]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불렀는데 사람들이 이것에 힘입어 보전하였습니다."고 되어 있어서 전라도에서 최초로 장시가 발생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5세기말 전라도의 입지적 조건과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형성된 지역의 장시(場市)는 물화의 교역으로 부족한 지역 물품을 보태주고 사람들 서로간의 생산 잉여물을 교환하여 상호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다양한 경제적 공간이었다. 시장은 그렇게 물질적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지만 서민들의 욕망, 시대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본성, 서로 부대끼며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감성들이 용해되는 또 하나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시장은 사람들이 아무런 '팔 물건'도 없이 장날에 나가서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고 서로의 안부를 전하거나 함께 막걸리 한잔에 담소를 나누는 즐거운 오락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장이 파하면 쓸쓸히 뒹구는 장터의 끄트머리는 심정적으로 더욱 사람들을 쓸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장시(場市)는 서로의 소식을 듣고 외지의 정보를 듣는 공간이면서 심지어는 서로의 인연을 통해서 혼사를 맺는 중개소였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친정 소식을 주워듣고 혼기에 찬 이웃 사돈팔자의 과년한 처자를 중매서는 곳이기도 하였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스키너(G.W.skinner)는 통혼권이 시장권의 영향을 받으면 시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족외혼의 범주가 설정된다고 하였다. 시장의 사회사적 측면에서 보면 장시는 정보를 교환하고 수집하며 홍보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지방장시가 5일장으로 통일되면서 장시는 지역주민들이 자생(資生)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지방장시는 적어도 5일에 한번씩은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모였다 흩어져는 장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장시의 성격을 이용하여 정부는 왕의 윤음(綸音)과 정령(政令) 등 지방의 시책을 반포·홍보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또한 암행어사들은 장시를 이용하여 윤음을 반포하기도 하였으며 역으로 향촌사회의 실상이나 민간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장시의 사회적 기능은 정부와 관리가 백성들의 삶과 생활을 관찰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불만자들이나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이 이것을 널리 알리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영조 3년(1727)의 '영조실록'에서도 "전라 감사 정사효(鄭思孝)가 봉진(封進)한 흉서(凶書)를 불사르게 하였다. 이때에 흉역(凶逆)의 무리가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로써 몰래 선동하여 민심을 광혹케 하더니, 이에 이르러 익명서(匿名書)를 전주 시장에 걸어놓았으므로 정사효가 장계와 함께 봉진하였다." 전주 시장에 내걸려 있었던 흉서를 조정에서 불사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남원 시장에서도 흉서가 걸렸는데 그 글은 전주시장에 걸렸던 것과 말이 같고 필적도 같은 솜씨로 쓴 것이었다. 이러한 괘서(掛書)는 정부와 관료를 비판하거나 소요를 선동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내왕이 많은 곳이나 시장에 나붙었다. 영조시대에 연은문(延恩門)의 괘서, 남원(南原)과 전주(全州) 시장에 붙었던 동일한 괘서의 변고는 당시 정부로서도 골머리를 앓는 것이었으며 결국 범인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장시는 정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과 더불어 처형장소로 이용되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반역죄를 지은 자들을 효수하여 시장에 내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죄의 엄중함을 알렸다. 또한 근대사에서 사람이 북적이는 장터와 장날은 봉건정부의 모순을 타파하는 저항세력의 발효지점이었다. 1894년 4월 27일 전주의 서문 장날에는 새벽에 동학 농민군들이 장꾼으로 변장하고 시장에 잠입하였고 오시에는 장터 바깥의 용머리 고개에서 포 소리가 여러 번 울리기도 하였다. 성내에 잠입한 장꾼들이 안에서 난장판을 이루자 농민군은 서문과 남문을 통해 진입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은 언제나 역동적이다. 시대적 모순이 폭발하기도 하고 거사를 하는 사람들은 붐비는 인파 속에 숨기도 좋고 넉넉한 시골 장날의 인심은 쫓기는 의인(義人)들을 숨겨주기도 한다. 일제에 항거했던 전북의 3·1항쟁도 장날을 택하여 일어났고 시장과 시장을 이으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전주의 남문시장 또한 자연스레 시위대열이 집결되는 상징적 집합지였다. 전주의 3·1항쟁은 1910년 3월 13일 전주 남문시장의 장날을 택하여 일어났으며 시위대열은 목판으로 인쇄한 태극기를 가마니 부대에 담아 시장으로 옮겨와서 일반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남원지역도 4월 4일 남원시장에서 1천여명이 시위를 했으며 익산도 익산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산지방도 3월 6일 장날에, 김제지역에서 3월 20일 원평 장날에, 만경면에서는 4월 4일 만경 장날에, 부안에서는 3월 30일 장날을 기해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조선 후기의 장시는 민중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오락과 유희의 장이었다. 농사의 천하 대본을 위해 한때 시장이 억제되었으나 이제는 민생 유지와 다양한 사회적 기능 때문에 허용되는 중요한 정책 대상이 되었다. 삶의 터전으로서 장시는 투전과 골패 등의 잡기가 벌어지고 무뢰배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폐단도 나왔다. 어떤 사람은 소를 판 돈으로 투전판에 뛰어들었다가 주머니를 탕진하기도 하였다. 사당패와 걸립패(乞粒牌)들이 장터를 돌면서 놀이와 공연을 하면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흥보전'에서 놀부의 박타는 장면에서 각설이패들이 나와 전라도 타령을 부르는 대목에서도 시장을 떠도는 대목은 흥겹기만 하다. "떠르르 돌아왔소. 각설이라 멱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뚤뚤 몰아 장타령, 흰 오얏꽃 옥과(玉果)장, 누런 버들 김제(金堤)장, 부창부수 화순(和順)장, 시화연풍 낙안(樂安)장, 쑥 솟았다 고산(高山)장, 철철 흘러 장수(長水)장, 삼도 도회 금산(錦山)장, 일색 춘향 남원(南原)장, 십리 오리 장성(長城)장, 애고애고 곡성(谷城)장" 시장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서로간의 필요한 물자를 바꾸면서 서로의 정을 나누던 곳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로운 소식을 주워 들었던 곳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주막집에서 주모의 뒷모습에 가슴 설레이다가 파장이 되어서야 막걸리 잔에 취한 몸을 갈지자로 버티면서 귀가하는 우리 어른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문화가 있고 진한 서민과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었다. 또한 정읍사의 여인네처럼 먼 거리에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며 동구 밖을 서성이는 우리의 아낙네들이 장터와 함께 있었다. 전북의 지방 장시는 오늘날 60개로 줄어들고 그것도 시골의 외진 곳에서 초라하게 열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들의 모습은 그곳에 있으며 한번쯤은 훌쩍 장터로 떠나서 순대국밥과 막걸리로 빈 속을 채우고 어디선가 들려올 듯한 흥정소리, 각설이패의 장타령, 왈짜패의 욕설,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을 가슴에 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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