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테마기획> 장날, 그 빛바랜 추억을 찾아서
문화저널(2004-04-20 15:36:23)
?현대화 눈앞에 둔 장계장, 어디로 갈까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전주-장계간 26번 국도, 장계면에 가까워오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온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사위를 밝히기 시작했지만, 겨울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던 추위는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옷깃을 파고든다.
장계의 새벽 우시장, 길다랗게 줄을 늘어선 트럭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소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렇게 많은 소들이 일제히 울음을 울어대는 풍경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터라 엷은 흥분이 인다. 우시장 한 쪽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시커먼 ‘꾼’들이 시끌벅적하게 탄핵사태를 논하고 있다.
“×새끼들이지, 그게... 대통령을 즈그들 맘대로 끌어내리는 법이 어딨어. 죽일 놈들이여...” 한참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이방인을 보자 관심을 보인다. “어서 오셨소? 우시장 볼라고 여까지 오셨소? 글먼 우리 테레비에 나오요?” 자기들끼리 뭐라고 농을 주고받더니, 한참을 웃어재낀다. 장계 우시장이 볼만하다고 해서 왔다고 했더니, “암만 글제... 딴디는 다 폐쇄되고 전북에서는 남원허고 장계가 그래도 괜찮으제. 여그 생긴지가 한 50년 될거요” 한다.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되기 전이다. 사무실에 들러 기본적인 정보를 얻어듣는다. 장계 우시장은 장수축협에서 운영하고, 관리는 직원이, 거래는 거간꾼(중개인)이 성사시켜 수수료를 챙긴다. 장계리에서 소도 키우고, 우시장에서 중개를 한다는 육점수(59)씨는 소를 팔거나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우시장의 가장 능력 있는 중개인이다. 하루에 몇 마리나 거래되느냐고 묻자, “쩍으먼 30마리, 많으면 50마리까지 거래돼요” 한다. 요즘은 브뤼셀라나 광우병 때문에 소 값이 자꾸만 떨어진다고 걱정이다.
“장계 우시장이 지금은 규모가 줄어들어서... 옛날엔 중개인만도 30명 정도 됐는디, 요즘은 다섯명뿐이요. 나 허는 일요? 시골 사람들이 시세를 잘 모르잖소. 중개인이 시세나 정보를 잘 아니까, 적당히 사고 파는 사람 중간에서 대신 값을 흥정해 주는 거지 뭐. 눈치도 좀 있고 다른 우시장도 많이 다녀봐야지.”
그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본격적으로 우시장이 열릴 참이다. 육씨 아저씨가 돈 벌러 출정한다.
“암말도 말고 요거 가지가. 키우먼 좋을 것이네.” “이거 작년에 80만원 받고 판건디, 지금은 50만원배끼 못 받잖아~”. “아, 글도 시세가 있는디... 여그 봐봐, 돈 더 없당게? 딱 그 돈만 갖고 왔어~”
사고 파는 이들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주인 바뀐 소들이 다시 트럭 위로 올라간다. 거간꾼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어 잘 팔고 잘 사주는 중개인에게는 할당된 소가 더 많다. 중개인마다 거래를 진행하는 자기 구역도 정해져 있다.
육씨 아저씨는 오늘 배당된 스무마리 중에서 열마리 정도를 팔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평소엔 60~70% 정도는 성사되는디, 오늘은 시세가 안 맞아서...”하며 아쉬워한다. 중개인에게 큰 소는 마리당 1만원, 송아지는 5천원의 수수료가 떨어진다. 한시간 30분만에 5만원~10만원 이상은 가져가는 셈이니, 제법 짭짤한 소득임은 분명하다. 소득이 좀 되느냐는 질문에 “그냥 살 만허요”했던 육씨 아저씨의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
전쟁 같던 우시장이 서서히 막을 내린다. 장꾼들이 하나둘 아침을 먹으러 시장 안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햇볕이 내려온다. 우시장이 끝나면 본격적인 장꾼들의 장사가 시작된다.
장계 5일장(3?8일)은 1960~70년대 전북에서는 금산장 다음으로 가장 번성하던 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 금산과 진안 인삼장이 커지고 장꾼들이 몰리면서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재래시장이 일제히 침체 일로를 걷게 되면서 장계장의 영화도 옛말이 됐지만, 그래도 전북지역에서는 그나마 장이 잘 서는 곳이다.
장수군이 최근 장계시장 활성화사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부터는 새 바람이 불고 있다. 기관장과 각 면, 마을 대표 등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가 결성돼 재래시장을 현대화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비와 군비, 중소기업청의 지원으로 20억원의 예산을 확정해 놓은 상태. 이르면 4월이나 5월께 공사가 착수된다고 하니, 그나마 옛스런 장계장을 볼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상인들과 주민 일부에서 불만을 제기하거나 ‘현대화’를 건물만 새롭게 짓는 쪽이라면 더더욱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뼈 있는 소리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시장 안에서 35년째 가방 장사를 하고 있는 ‘가방 아저씨’는 “새 건물 짓는 거? 안되야~”하면서 손사래를 친다. 극구 “이름은 알 거 없다”며 무심한 체 하던 아저씨, 그래도 할 말 다 한다. “사람이 없는디 건물만 잘 짓는다고 되겄어? 건물이 현대식이면 인테리어도 현대식으로 해야 허고, 물건도 다 현대식으로 포장해야 되잖여. 그래야 아구가 맞잖아. 상설시장은 어쩔랑가 몰라도, 5일장 맛은 없어지제. 시장이라고 해봐야 한바쿠 돌면 끝인디, 여그다 만남의 광장이 뭔 말이여. 거그서 늙은이들 연애허라고? 그것이 뭔 필요냔 말여.”
그렇다면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히고 싸우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집 지어준당게 그냥 가만 있는거여. 목 좋은디 꿰차는 사람은 그래도 좋지 않겄어?” 한다. 재래시장의 현대화가 오히려 해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해를 하면서도, 유리한 점포를 임대하거나 자신만의 상점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 은근히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아직 상인들도 반신반의의 분위기에서 확실한 입장을 내보이기 어려운 눈치다.
30년동안 이곳에서 밥장사를 했다는 김순자(68) 할머니. “성가셔... 세간 다 옮기고 그래야 헐꺼 아녀. 헌당고 헝게 그렁거지, 사람이 없는디 장사가 되겄어. 옛날에는 큰솥에 장작불 때서 밥을 말가옷(한말 반, 쌀 12kg) 넘게 혔어. 근디 지금은 쪼깐헌 전기밥솥에 허고 말지 뭐. 사람이 없어, 사람이...”라며 한숨이다.
옆에서 “아까 소전서 사진찍던 양반 아니요?”하며 한 할아버지가 알은체를 한다. 무주 적상면에서 왔다는 이진효(68) 할아버지, “장계에도 큰 마트가 생긴게 쪼깐한 수퍼는 다 죽었어. 소값도 한 백만원 떨어졌고. 방송국서 나왔응게 허는 말인디, 브뤼셀라니 광우병이니 한번만 나오먼 되지 뭘라고 자꼬 나오는가 몰라. 안그려?”하며 쏘아붙인다. 방송국이 아니라 잡지사라고 했더니, “아 긍게, 그게 그거지 뭐...”하는 바람에 밥집이 웃음바다가 된다.
좀처럼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장날 풍경, 하나같이 “사람이 없다”고 한숨짓는 상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침체되어 가고 있는 농촌의 현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현대화’ 바람 속에 새 모습을 준비하고 있는 장계장은 이제 옛 기억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갈 참이다.
?푸근하던 강진장의 쓸쓸한 뒷자락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옅은 안개까지 끼기 시작했다. 오슬오슬 추위에 떨며 임실 강진에 이르니 버스터미널 뒤로 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낯선 시골 마을이라 해도 장터는 으레 쉬 찾아지는 법인데, 강진장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만 찾으면 어김없이 장터였지만, 강진장(2?7일)은 비까지 겹쳐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아침으로는 좀 늦고, 점심은 좀 이른 10시 30분, 그나마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수집을 먼저 들른다. 국수 장사 20년을 했다는 정옥례(58)씨, 항상 장날 이렇게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없어... 나는 그래도 국수집이 여그 하나라 그나마 먹고는 사는디, 딴디는 어렵제. 근디 여그로 옮겨와서는 더 안되야, 생각허먼 분허기만 헌디...”하고는 한숨부터 뱉는다.
임실 강진장은 3년 전 건물을 새롭게 정비해 현대화했다. 정씨 아주머니의 ‘분함’은 바로 ‘현대화’ 사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강진장 장꾼들의 반발로 임실군의 ‘장터 현대화’ 사업은 저항이 컸다. 목 좋은 곳을 두고 상인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적지 않게 충돌했고, 건물을 정비하면서 자체 부담도 있던 터라 지금까지도 상인들 사이엔 불만이 적지 않다. 그나마 현대화로 사람이 몰리고 장사가 잘 되면 모를까, 상황이 그렇지 못해 상인들은 울상이다.
옆에서 국수를 먹던 한 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놓고 아주머니를 거든다.
“여그야 그전만 못허지. 지금은 찬바람만 돌아. 예전에는 장날 오먼 박신박신하니 재미났는디, 갈수록 기분이 안 나지 뭐. 장판이 좀 훈짐(훈김)이 나야허는디 지금은 그냥 볼 일만 보고 휑허니 집으로들 가고 그래.”
내외가 나란히 장보러 왔다는 송영일(68?강진읍 문막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디에 두고 오셨냐”고 물었더니 “빠만가 뭐신가 헌다고... 머리허러 갔소” 한다. “우리 동네도 시방 젊은 사람이 없어. 맨 노인들뿐이여... 쉰살 묵은 사람들도 뵈지를 안혀. 나도 애들이 다섯인디 다 전주 살고 서울 살고 그러거든”하면서 노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장날이면 다 같이 모여 북적대던 옛 장날 풍경이 어지간히 그리웠던 모양인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나 퐅칼국수 한 그럭 주시오!” 조용하던 국수집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장터 맞은편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는 임종성(57)씨. 강진에서 태어나 여태껏 이곳에서 살아오며 짜장면 장사, 가스 장사를 오래 해왔는데, 몇 년 전에는 뱀 장사에 나서 짭짤하게 재미를 봤단다. 그러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에 걸려 벌금을 물고는 뱀 장사를 접고 8년 전부터 건강원을 운영하게 됐다는…. 바야흐로 아저씨의 인생역정이 줄줄이 이어진다.
보아하니 임씨 아저씨는 시장의 ‘정보통’인 것 같다. 제일 오래 장사한 터주대감이 누군지, 현대화 사업 이후의 장터 상황에 대해서도 빠삭하다.
“상인들이야 어쩔랑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외지 사람들이 통 안 온다 이 말이여. 여그 뜯어고치기 전에는 아가씨같이 사진기 들고 찾아오는 외지 사람들이 겁나게 많았거든. 그 사람들이 막걸리라도 팔아주고 그랬는디 지금은 없어. 긍게 현대화라는 것도 함부로 허는 것이 아니랑게. 여그서 젤 오래 헌 사람? 나만 따라 와... 내가 다 알려줄랑께”
옆에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소주며 막걸리를 한잔씩 돌려가며 사더니, 한사코 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자가 먹은 국수값까지 치른다. 여기에서는 소주를 잔으로 파는데, 한 잔에 3백원이다. 좀 큰 맥주잔에는 소주와 계란도 풀어주는데 그건 천원씩 받는다.
임씨 아저씨는 그리고 나서 50년째 장터 터주대감으로 살아온 김봉학(78) 할머니의 밥집으로 안내한다.
“내가 50년 전에 여그서 새비젓 장사를 했거든? 순창서 떼와서 큰 돈도 벌고 그랬어. 글다가 30년 전에 장터가 여그로 옮겨짐서 밥집으로 자리를 잡았제. 그때는 스댕으로 밥 한 그럭이 150원이었어. 참말로 옛날 일이네.” 강진 구시장은 지금의 터미널에서 7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30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단다.
요즘 왜 장사가 안 되는 것 같냐고 물었더니, “예전이야 핵교가 있어서 선생들이 많이들 와서 장사가 됐었제. 지금은 분교되고 폐교되고 험서 선생들도 없잖아” 한다. 차부 근처에 장터가 서는 것은 교통 요충지에 사람이 몰리기 때문, 버스로 출퇴근하던 교사들이 장터 밥집을 자주 이용했지만 학교가 없어진데다 다들 자가용이 생겨 술도 안 먹고 밥도 다른 곳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라고 김 할머니는 분석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사람들 발길이 뜸해지고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한 게 대략 10년 전쯤인 것 같다고 덧붙인다.
장돌배기들도 외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고, 이 근동에 사는 수완 좋은 주민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텃밭에서 키운 야채며 민물에서 건진 다슬기를 들고 나와 난전에 자리를 편 할머니, 아주머니들, 하루에 얼마나 파느냐고 묻지만, 좀체 대답이 없다. 건강원 임씨 아저씨는 “장사가 잘 돼야 물어도 대답을 허는디, 잘 안 되잖여. 긍게 묻는 걸 싫어허지. 긍게 아가씨도 뭘 좀 삼서 물어~...” 하면서 면박을 준다.
아, 그런거냐고 민망하게 웃고는 비까지 내려 더더욱 을씨년스러운 강진장을 돌아선다. 임씨 아저씨가 김 할머니 집에서 술을 권한 것도 아마 하나라도 더 팔아주기 위한 아저씨만의 인간적 ‘도리’였을 거라고 짐작하면서.
?도심 속 5일장, 신기하다! 익산 북부시장
익산 남중동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 북부시장(4?9일). 도심 속 재래시장이야 대부분 상설시장으로 운영되지만, 이곳은 좀 다르다. 상설시장에 5일장이 결합한 ‘독특한’ 형태에 대형 할인마트 못지 않게 사람과 자금의 유통이 활발한 곳이다. 이미 방송이며 신문에 소개돼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던 곳이다.
바람이 유난을 떠는데다, 옅은 황사까지 겹친 까탈스런 날씨에도 시장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 발 디딜 틈이 없다. 여느 장처럼 그렁저렁 돌아다니며 시장의 흐름이나 정보를 얻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미로 같은 장터를 헤치며 운 좋게 (주)북부시장 사무실을 찾았다. 1975년부터 북부시장에서 근무해온 유학선 사장의 이야기에서 북부시장에 관한 정보며 도심 속 재래시장의 가능성 등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여느 도시처럼 평범한 상설시장으로 이용되던 북부시장에 5일 장이 결합된 건 1980년. 1983년에는 지금의 4일과 9일 장이 정착되고 노점상이 활성화되면서 20여년 동안 지금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엔 북부시장이 그렇게 유명한 곳이 아니었어요. 근처 시골 아낙들이 자기들이 직접 키운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가져다 놓고 팔면서 서서히 노점상이 활발해졌고, 이들이 또 기존 상설시장 안에 자리잡은 상인들의 공산품을 사가면서 상인과 노점상 사이에 자연스레 유통이 이뤄진 것이죠. 그러면서 시장에 활력이 생긴 겁니다.”
노점상 유입이 상설시장과 5일장에 활력을 불어넣은 단초가 됐다는 것이 유 사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노점상이 늘고 그들이 취급하는 품목이 다양해지면서 상가 상인들과 노점상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형성됐다. 노점상의 숫자가 상가 상인의 10배가 넘는다고 하니, 상가 상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견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 유 사장은 “노점상과 5일장에 대해 상가 상인들 사이에서도 50%는 긍정적이고, 50%는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한다. 지난해 북부시장 직원들이 파악한 노점상 상인은 대략 1000여명 가량. 상가 상인 150여명에 10배 가까운 수준이다. 상설시장이 대지 2천평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면, 노점상은 6천평에 걸쳐 분포해 있어 그 위세가 실로 대단하다. 게다가 노점상 상인의 평균 하루 매출액이 10만원 안팎이라는데, 여기에 곱하기 1000명을, 그리고 상설시장 매출액까지 합치면 북부시장의 자금 유통은 결코 만만치 않은 셈이다.
장똘배기 상인들은 익산은 물론, 강경 연무대 대전 서천 서산 군산 김제 곡성 구례 여수 등 충청과 전라남북도에서 다양하게 모여들어 그야말로 없는 것 없는 ‘만물상’ 집결지다. 유 사장은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 다음으로 가장 큰 5일장일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도심 복판에서 벌어지는 5일 장이니, 인근의 교통체증이나 쓰레기 수거, 소방도로 미확보, 낡은 전기 시설 등은 북부시장의 명암을 갈라놓는다.
북부시장이 공설이 아닌 사설시장이어서 행정적인 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유 사장의 설명. 그러나 “시장 내 화장실 증축과 주차장 확보, 전기시설 교체 등을 위해 중소기업청과 자치단체, (주)북부시장 자비 등을 합쳐 총 3억원을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환경개선을 위한 작은 탈출구 정도는 마련될 것”이라는 게 유 사장의 기대다.
재래시장이 날로 침체돼 가고 있는 추세에서 북부시장의 ‘파워’는 충분히 주목할 만한 사례다. 하지만 3년 전 익산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영등동에 롯데마트가 들어선 이후엔 이곳 역시 상당한 타격이 있었다. 게다가 이마트 입점 소문도 솔솔 피어오르고 있어 북부시장이 지금의 위세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송충이가 솔잎 먹어야지 갈잎 먹으면 안되잖아요. 마트는 재벌이 하는 거지만 우린 아니고... 시장 현대화라는 것이 그 대형마트를 어떻게 따라 갑니까. 그렇게 해서는 따라가지도 못할뿐더러 어중간하게 현대화 했다간 특성도 잃어 경쟁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재래시장 나름의 특성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한 문제죠.” 북부시장에서 30년을 일해 온 유 사장의 ‘시장 철학’을 끝으로, 사람이 북적대는 시장통으로 다시 들어온다.
사람에 치여 운신하기도 힘들만큼 북적이는 북부시장, 도심 속 5일장의 푸근하고 정겨운 맛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다.
?황등장, 아련한 장날의 추억
아련한 추억 속의 장터는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북적대는 장거리에는 온갖 먹거리들이 가득하고 부지런한 우리네 이웃들이 거기 모여 훈훈한 인정을 나눴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뉘 집 처녀가 배부르게 된 사연이며, 서울대에 합격한 뉘 집 아들 얘기, 어느 영감의 부고 소식까지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또 ‘뻥’소리와 함께 온 시장바닥을 구수한 냄새로 가득 메우던 뻥튀기 장사와 엿 장사의 경쾌한 가윗 소리는 장터를 찾은 이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뜨거운 순대국밥 한 그릇으로 속을 데우고 ‘골라골라’를 외치던 장돌배기 옷장수 아저씨와 노란 병아리 몇 마디 갖고 나와 양지바른 난전에서 졸던 어느 아주머니까지, 장터는 그대로 사람냄새 가득한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
소문난 비빔밥 한 그릇 먹어보겠다고 군침을 삼키며 나선 황등장. 익산 시내를 빠져나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황등장이 서고 있었다. 도시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 과연 5일장이 제대로 설 수 있을까. 한 때 황등장은 면 단위의 5일장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지금은 장이 열리는 20여 미터 길이의 재래시장 안 이외엔, 난전하나 제대로 서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어. 5일장이 서면 황등이 전부 장터가 될 만큼 크기도 컸지. 황등 저 끝에서부터 돼지전, 닭전, 소전, 개전이 다 따로 있었어.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댔었으니까. 저 앞에 신발장사 있잖여.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장에 다닌 지 한 20년 됐는데, 예전엔 세 사람이 달라붙어도 일손이 부족할 만큼 바빴어. 그런데 지금은 하루 웬 종일 그냥 앉아만 있잖여”
40년 넘게 이곳 장을 지켰다는 박복순 할머니(71)는 황등장의 산 증인이었다. 그도 한때는 채소와 과일을 팔아 재미를 톡톡히 봤지만, 지금은 사람구경하기 조차 힘들다고 한다. “저기 익산에 북부시장이 크게 생기면서부터 황등장이 죽기 시작했어. 교통도 좋아지고 자가용도 늘어나다 보니께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가드라고. 거기다가 이 좁은 곳에 농협 하나로마트마저 생겼으니께, 5일장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겄어”
하지만, 재래 시장통 안은 그런데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북적이기까진 않아도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은 생선장수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고, 시장 군데군데엔 벌써부터 거나하게 약주 한잔씩 드신 어르신들이 앉아있다. 시장 맨 끝에 자리한 리어카에서 틀어 놓은 최신 트롯은 장 분위기를 돋우고 있고, 조그마한 잡화난전 위엔 재래식 부엌칼에서부터 아이디어 카세트 겸 후레쉬며 건전지, 줄자, 지갑, 충전용 후레쉬, 망원경까지 전통과 현대가 총 망라되어 있다.
장돌배기가 펼쳐놓은 옷 더미 앞에선 상인과 약주 드신 할아버지 간에 정겨운 애누리 신경전도 펼쳐진다. “2만 5천원? 나 만원짜리밖에 없는디, 그냥 2만원에 주쇼. 어, 그래야제. 여기있소 2만원. 가만 그라고 봉게 막걸리 값은 빼줘야 되겄는디. 에이, 그래도 장날이라고 여그까지 왔는디 차비는 못 빼줘도 막걸리 한잔 값은 빼줘야제” 결국 작은 실랑이 끝에 그 할아버지는 2천 원을 더 받아 가신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추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길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땡벌 땡벌 당신을 좋아해요’
“허, 좋고~” 막걸리 값 2천 원에 기분 좋아지신 할아버지가 최신 트롯가요에 장단 맞추며 막걸리 집으로 향하시고, 황등장엔 봄날 오후의 을씨년스런 바람이 봄나물 캐온 할머니의 졸음을 재촉한다.
?우시장과 고추장으로 유명했던 순창장
비록 길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전주에서 순창 가는 길은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순창장은 3과 8로 끝나는 날에 열리는 5일장.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던 우시장과 고추장으로 유명한 장이다.
순창읍 5일장은 지난 1923년 생겨나 130여 개의 장옥(점포)에서 쌀, 잡화, 철물, 옹기, 생선, 마포, 채소 등 온갖 생활 필수품들이 거래되던 장소로, 우시장을 겸해 전국에서도 소문난 시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번 둘러보는데 한나절이 걸릴 정도로 컸고, 징?장구전 등 볼거리도 남달랐다. 전라남도와 북도의 경계에 위치한 덕분에 온갖 장꾼들이 다 몰려들어 씨름도 하고 난장도 터졌던 순창장은 이곳 지역민들의 커다란 축제나 다름없었다. 그런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순창장은 장이 널려 있는 모습 그 자체가 볼거리일 만큼 아직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어물전과 야채전을 지나자 구수한 순대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냄새를 따라 시장통의 복잡한 골목을 따라가니 이른바 ‘순대골목’이 허기에 지친 장꾼들을 반긴다. 전국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던 우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대신 순창장의 명물로 떠오른 것이 이곳 순대골목. 이곳 순대골목에는 2대째 순대와 연다라순대, 장터순대, 곡성순대 네 개의 순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2대째 순대집이다. 어머니를 거쳐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이름을 ‘2대째’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곳 순창순대가 유명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딴디서는 보통 소장으로 순대 만들어요. 근데 순창에서는 대장을 쓰요. 소장은 길고 크기도 일정한디, 대장은 짧기도 하고 두껍기도 차이가 많이 나제라. 그래서 순창순대는 많이 못 생겼어요. 크기도 각기 다르고. 하지만 맛 하나 만큼은 정말 좋아요. 쫄깃 거리는 맛도 일품이제라. 울퉁불퉁한 대장 특성상 기계로 작업을 못하고 전부 손으로 작업해야 되서 손맛도 들어간다고 봐야겄죠”
가업을 이어받은 박승일(47)씨의 설명이다. 전라남도와 북도의 경계선에 위치한 곳이어서인지 남도 말투가 섞였다. 구수한 사투리만큼이나 혼자 앉아 끼니를 때우는 장터사람들에겐 소주한잔씩 공짜로 따라주는 인심도 후하다.
“요즘 손님들은 외지인들이 많제라. 특히나 주말이면 저기 서울이나 부산에서도 순대국 한 그릇씩 먹을라고 많이 오고요. 또 먹어본 손님들은 택배로 주문도 많이들 허요”
5일제 근무가 확산되고 대도시 사람들이 여가나 여행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면서 이곳 순창장에까지 그 여파가 불어온 것이다. ‘고향의 맛’을 다루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몇 차례. TV에 한번 나오고 나면 몇 달 동안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한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순대골목에서 빠져나와 한참을 찾아 순창장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을 찾았다. 이곳 대장간도 순창장의 명물이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순대골목’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몇 년 전부터 장날에만 문을 열다가 요즘엔 그나마도 뜸하다는 곳이다. 운 좋게도 그 날은 화덕에 불이 올라있었다.
주위의 건물들이 다 허물어진 대장간 앞엔 호미나 괭이 쇠스랑, 낫 등의 농기구가 진열되어 있다. 얼핏 보아도 철물점에서 파는 것과는 그 튼실함에 차이가 느껴진다.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뿐,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만 호미를 고른다.
“15살 때부터 대장간 일 시작했제. 그라고봉께 이 일만 50년을 넘게 했구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30년을 넘게 했고. 예전에는 여기 장에만 대장간이 6개 있었는데 다 문 닫고 여기배끼 안 남았네”
하지만 이곳마저 곧 문을 닫게 생겼다. 순창군이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내놓은 신작로 건설이 이 곳 대장간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은 다 허물어지고, 대장장이 노부부만 이곳을 지키고 있지만 조만간 아까운 화덕을 부셔야 한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순창군은 현재 재래시장 활성화를 정비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장 큰 뼈대는 1979년 새마을 사업으로 신축했던 117동의 장옥 교체와 시장을 관통하는 신작로 개설이다. 깨끗하게 정비하고 시민들이 쉽게 찾아가게 해 재래시장을 살려보겠다는 순창군의 자구책이다. 이 사업은 현재 실현 단계에 와있다. 이미 시범적으로 짓고 있는 몇 동의 장옥 지붕은 올라갔고, 신작로가 관통하게 될 곳은 철거가 시작됐다.
순창군은 이 사업의 핵심을 기존 재래시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는 것에 두고 있다. 때문에 기존 목조와 슬레이트로 건축되었던 장옥을 목조 판넬로 바꾸고, 시장을 관통하는 신작로 외엔 거의 기존의 형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사업 방향을 정하고 있다. 시골장터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순창군의 이런 야심찬 계획이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불러올 지는 아직 미지수다. 장날이 하나의 축제이던 시절은 지나고, 순창에도 속속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굳이 5일장을 기다리지 않는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쉽게 물건을 구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농촌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훈김 모락모락 나는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뻥튀기 장수며 호박엿 장수가 축제 분위기를 만드는 장터는 희미해져 가는 대장장이의 망치소리 만큼 그렇게 사라져 가는지도 모른다.
<장에서 만난 사람들>
-박스/장계장 대장장이 박추길씨
카메라 한번, 얼굴 한번 번갈아 쳐다보고는 장계장의 대장장이 박추길(63)씨는 무심하게 쇠를 달군다. 어렵게 말을 붙이자 굳은 표정과는 달리 살가운(?) 대답들이 돌아온다. 잘 되느냐고 말을 건네자 “여기는 인자 끝났어. 배운다는 놈도 없고, 아들놈도 배울라고 허질 않아” 한다.
국민학교 졸업을 하는둥 마는둥 10살때부터 아버지의 대장간 일을 거들다 어깨 너머로 쇠 다루는 일을 배웠단다. 이 일도 기술 있는 장인들이 하는 건데, 대를 물리지 않으면 그 기술이 아깝지 않겠느냐고 묻자 잠깐 웃음이더니, “옛날이야 돈벌이가 톡톡히 됐응게 했지만, 지금은 기계가 다 허잖여. 해봤자 노는일밖에 없는디 젊은 놈한테 이 일 뭐덜라고 시키겄어”라고 간단히 무지른다.
그런데도 박추길 아저씨는 왜 아직 쇠를 놓지 않는 걸까. “나야 배운게 도둑질이라 그렇고, 그래도 찾는 사람이 있응게, 시골은 여기 없으면 안 됭게 문은 못 닫지. 여그 앞에 평상 가득 만들어 논 것들이 지금은 1년 내내 가. 옛날엔 하루면 다 동이 났든 것들인디. 요새는 철물점 것이 싼게 글루들 가지. 그
래도 내 물건은 달라.” 세상에 대장간을 빼앗기고는 있지만, 대장장이의 자부심만은 그럴 수 없는 모양이다.
사람이 떠난 쓸쓸한 대장간에 두엇의 아줌마들이 호미를 산다고 들렀다. 비싸다는 말에 아저씨는 “잘 들고 존놈 살라먼 여그서 사고, 싸고 잘 빠지는 놈 살라먼 딴 디서 사고...” 하고는 다시 쇠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영원한 ‘빽구두’ 신사 김생연 할아버지
장계 우시장에서 눈에 확 띄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빽구두 신사로 통하는 김생연(84?진안군 동향면)할아버지다. 깔끔한 흰색 톤의 정장을 차려입은 김 할아버지, 소전 거간꾼으로 50년을 일 해왔다니 그야말로 장계장의 산증인인 셈이다.
흰 양말에 백구두가 인상적이라고 했더니, “옛날엔 날리고 살았어, 내가... 멋쟁이고 콧대 높고 그랬지. 나는 평생을 빽구두여. 사시사철 이놈만 신고 다녀. 발이 더러우면 안돼. 거그서 사람 품위가 나오는 것인게” 한다. 소똥이 질펀한 우시장에서도 긴 외투 자락을 뒤로 묶고, 유난히 백구두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장계장의 ‘멋쟁이 신사’라는 별칭을 그대로 입증해 준다.
“1970년도가 제일 번창했었지. 소도 많고 상인도 많고... 나도 그때 돈 많이 벌었어. 이 일은 눈치도 있고 활동력도 있고 사람 다루는 능력도 있어야 혀. 그래도 젤로 첫째는 신용이고 양심이제. 내가 양심껏 신용 지켜서 일을 허먼, 그 사람들이 또 다를 믿고 나중에 거래를 헌단 말이여.”
신용과 양심이 첫째라는 ‘빽구두’ 할아버지, 3~4년 전부터 우시장이 침체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장계장만 소일 삼아 나온다고 한다.
“테레비만 보고 있으먼 뭐해. 심심헌게 나와. 옛날엔 임실, 옥천, 김천, 함양, 남원, 안성, 무주, 안 가는 디가 없었는디, 요즘은 여그만 다녀. 얼매나 좋은가, 사람들 만나 농도 허고 친헌 친구도 오랜만에 보면 얼매나 반가워.”
요즘 한 달 벌이가 옛날 하루벌이랑 맞먹는다고 말하지만, 아쉬움은 그닥 느껴지지 않는다.
“나 시방 차부 가봐야 허는디? 서울 가야혀. 인자 고만 물어... 글먼 나 가네, 이?”
빽구두 김생연 할아버지, 흰 외투깃을 날리며 차부(터미털)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마냥 꼿꼿하다. 장날은 사람이 있어 푸근하고 정이 있는 것이리라.
-자장면집의 젊은 사장 남상효씨
익산 북부시장 안에는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있다. 예닐곱평 남짓한 자장면집이다.
얼기설기한 천막 안이 구수한 자장면 냄새로 가득하다. 세련된 지붕이나 세련된 의자는 기대하지 말 것. 흙이 보이는 땅 바닥에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가 전부고, 주방 역시 완전 개방된 구조다.
12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주방 옆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손님들이 기웃거리고 있어도 “조금만 기다리라”거나 “어서 오시라”거나 하는 수인사 한마디 없다. 사장 남상효(32)씨는 면발을 꺼내 삶고 헹구고 를 정신없이 반복하고, 종업원 아주머니 셋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자장면을 손님들에게 나르고 빈 그릇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옆에 서 있자니, 혼이 다 빠지는 것 같다.
젊은 남사장에게 어렵사리 말을 붙인다. 언제부터 장사했느냐고 묻자 “1980년부터 아버지가 여기서 장사를 했는데요, 제가 한 12년 전에 물려 받았어요.” 한다.
뜀박질하듯 끈질기게 달라붙어(?) 하루에 몇 그릇이나 파느냐고 물으니, 4~5백 그릇 판다고 단답형 대답이 돌아온다. 한 그릇에 2천원, 얼추 하루 매출액이 나온다. 그것도 종일 장사가 아니라 아침 10시부터 2~3시정도만 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알짜배기 중에 알짜배기 장사다.
“스무살부터 일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만 잘 팔려요. 비결요? 그런 거 없는데...” 바빠선지 무뚝뚝해선지 아무튼 이 집, 장사 잘 되는 비결은 없단다. 굳이 캐묻자 “맛있으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만 돌아올 뿐이다.
얼마전 <VJ 특공대>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고 자장면 먹던 손님이 정보를 일러준다. 잘 나가는 자장면집 비결, 맛도 맛이겠지만 자장면보다는 세련되지 않은 토속적인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팔리고 있는 건 아닌지 실례의 생각 한 토막이 잠깐 스쳤다.
-난전만 40년 동안 펼친 서순례 할머니(77)
“이거? 마늘밭 콩이여. (네? 무슨 콩이라구요?) 강낭콩이라고. 마늘밭에다가 심궈서 그냥 마늘밭 콩이라고 하는거여”
그나마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시장통 좁은 길, 양지바른 곳 한켠엔 서순례 할머니가 난전을 펼치고 있다. 깔판 위에 손수 가꾼 팥이며 참깨, 콩나물 콩, 들깨, 조 등은 물론 참기름, 들기름, 메주까지 있다. 작지만 양곡상회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품목의 곡식들이 펼쳐져 있고, 몇몇 품목엔 중국산이라는 팻말까지 꽂혀져 있다.
“장사는 신용이 제일이지. 여기가 번듯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장날에만 장사하지만 몇 십 년 된 단골들도 있어. 신용이 없으면 어떻게 몇 십 년 동안 한자리에서 장사하겠어. 난 절대 손님 안 속여. 내가 키운 것도 있지만, 중국산은 꼭 중국산이라고 말하고 또 그만큼 싸게 팔아야지” 비록 난전이지만 할머니의 장사에 대한 철학은 철저했다.
“시집오자마자 농사지으면서 장날이면 여기 나와서 장사했지. 이걸로 6남매 키웠어. 지금은 용돈도 안되지만, 그래도 재미삼아 계속하는 거야. 애들은 절대 못하게 말리지. 근데 이거라도 안하면 노인네 심심해서 어디 살겄어. 뭐 하나라도 신경 쓰이는게 있어야지. 여기라도 나와야 사람구경이라도 하고 말이야”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아는 체를 하신다. 오래 된 단골이라고 한다.
“노인네 누웠다고 하더니 어떠신가. 다행이구만. 그만하길 다행이여. 그나저나 나 참기름이나 한 병 주소.” 장날은 아직 이런 우리 이웃들이 있어서 따뜻하다.
-순창장 터주대감 박종태씨
“참말로 순창 우시장 하믄, 예전엔 둘째가라면 서러웠제”
본격적으로 난장이 시작되는 장의 입구, 간판도 없는 철물점을 지키고 있는 박종태(59)씨의 기억이다. 이 자리에서만 순창장을 지켜온지 30년 된 터주대감이다.
“전엔 ‘태일철물’이라는 어엿한 간판이 붙어있었지만 몇 년 전 태풍에 날아가 버리고 그대로 고철상에 가져다 줘버렸제. 간판을 다시 올릴 필요를 못 느낄 만큼 손님수가 부쩍 줄었거든”
간판도 없는 철물점 앞에는 낫이나 호미 등 농기구는 물론이고 개목걸이, 쥐덫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시장 잘될 때는 참말로 술집도 잘되고 재미도 있었는디, 술집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니께. 그런데 지금은 교통도 좋아지고 큰 마트도 여러 군데 생겨서 점심때만 지나면 썰렁해. 사람들도 필요한게 있으면 아무 때나 나와서 얼른 사갖고 휑하니 가버리고”
마침 장날이라고 마실 나온 신후식(57)씨가 찾아온다. 서울대 들어간 아무개의 아들 얘기며 이번에 시집 간 아무개의 딸 얘기 등이 오가더니 결국 탄핵정국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자식 같은 소 팔아 막걸리 한 잔에 미안함 달래는 촌부들의 모습은 이미 기억 저편이지만 여전히 장날은 이곳 사람들에게 사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