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부조리적인 아포리즘(Aphorism)의 공간-차주만 展
김미선. 전북대 강사, 서울 청담동 <갤러리 서화>근무
(2004-04-20 15:37:31)
부조리적인 아포리즘(Aphorism)의 공간-차주만 展
-오른손이 바른손이 아니다.
-오른손이 바른손이 아니다.
-오른손이 바른손이 아니다.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이 바른손이고,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이 바른손이고,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이 바른손이고,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이 바른손이고, 왼손잡이는 왼손이 바른손이다……
때아닌 3월의 폭설이 있었던 즈음, 나는 차주만의 제3회 개인전이 열리는 전주 서신갤러리로 향했다. 그 날은 올 들어 황사까지 가장 심하게 불어댔고, 우중충했던 하늘 탓인지 갤러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조금은 어둡고 서늘한 갤러리의 조명이 유별나게 섬뜩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듯 했다.
그리고 나의 시야에 비친 절규하는 듯한 광경! 작품 “폐쇄된 체계”였다.
“폐쇄된 체계"는 전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위압감으로 관객을 먼저 맞이하는데, 작품은 대형 사각 철재 틀 속에 - 해체된 - 돼지고기가 대형 낚시 바늘의 갈고리에 찍혀 와이어(Wire)와 로프(rope)에 의해 사방으로 사지(四肢)가 ‘쫙’ 벌려진 형상이다. 찢겨질 듯 당겨진 ‘날고기’는 혐오감으로 아연질색하게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작품 “적자생존-가장 오래 살아남는 개체”는 털이 군데군데 붙어있는 돼지 껍질 누더기를 조각조각 오려붙인 2개의 이종(異種)인간을 보여준다.
동시에 오른손과 왼손을 되풀이하는 무의미한 상투어는 사뭇 이미지와 텍스트(text)가 별개인 듯 혼란스럽게 보인다. 이는 작가의 의도된 이중의 강박관념에 노출되었기 때문인데, 관객은 작품의 난해함으로부터 오는 자괴감과 비극적인, 구역질나는 혹은 흉하게 일그러진 메스꺼운 날고기의 생경함을 느낀다.
차주만의 작품세계는 자기반성적 성찰과 외부적 상황(사회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일련의 노력은 2001년의 개인전부터 뚜렷이 나타나는데, 2001년의 설치작품 “호흡하기”는 자신의 구체적 체험을 확장한 것으로 7m가 넘는 거대한 철판에 물을 담고 물에 빠진 한 사람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작품은 물에 빠져 얼굴만 드러내고 호흡하는 자신의 자화상을 보여주면서, 한편 한계상황 속에서 저항할 힘을 잃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될 수 있는 작품은 2003년 인천 무의도 갯벌에서 열렸던 작가의 환경설치작품인데, 작품은 살아있는 낙지의 다리들을 찢어지기 일보직전까지 최대한 벌린 생태적 실험이었다.
“나는 낙지라는 하찮은 미물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었던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현대사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으로 전이(轉移)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의 중요한 화두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이와 같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사회관계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작가는 ‘넘어지다, 넘어뜨리다’의 구체적 현상으로 일상의 사람들이 타인 또는 다른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신념의 체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반문한다. 바로 오른손이 바른 손이라고 믿는 것과 같이.
차주만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의 채택된 믿음은 절대적인 패러다임(paradigm)이 되어서, 이것이 한 집단의 삶의 방식의 근원이 되었을 때는 그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 되고, 사람들은 세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잃게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체계가 반론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해결의 의문을 갖지 않는데, 이는 자신들의 신념 체계에 의심을 가지고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의 패러다임이 좌절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폐쇄된 체계(closed system) 속에서 살고 있다. 폐쇄된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일단 폐쇄된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면 아무리 생경한 것들도 머리카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죄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하나의 코드(code)만이 존재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반박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라면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 ‘사회관계의 총체성’이라는 명분 하에 - 자기의 관점에서 분석되고 비판되고 묵살되는 ‘불완전한’ 공간인 것이다.
작품 “폐쇄된 체계”는 이러한 불완전한 사회적 풍토를 보여준다. 사방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돼지고기는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의 우리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주만 작품의 중요한 속성을 감지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학적 웃음과 그와 뒤섞인 신체적인 혐오, 공포 따위의 반대 반응적 양면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은 우리의 지적인 세련된 반응과 나란히 우리 내부 깊이 무의식의 어떤 영역에 묻혀 있는 어떤 것, 은폐되어 있으나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가학적 충동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들에 대해 환희와 야만적 기쁨을 만끽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적자생존-가장 오래 살아남는 개체” 등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 작품은 2개의 변형인간상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일그러지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작은 얼굴에 비해 괴기하고 비대한 몸을 가진 등신상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돼지 다리나 꼬리, 귀, 기타 부위들이 기형으로 이식(移植)된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다. 모두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 개체를 열망하지만, 진작 적자생존의 최강자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육체적 실체성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작가의 노력은 최소한 ‘신체적으로 비정상적인 것’과 강한 친화력을 갖는 점에서 그로테스크(grotesque), 즉 ‘부조리’적인 것이다.
차주만은 실험성이 강한 충동의 산물로서 주관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 일종의 갈등에 의존하는,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를 표현한다. 즉, 새로운 관점에서 봄으로서 친숙한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은 우리의 내부적 자아와 외부세계의 갈등을 미해결 함으로써 심각한 일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다시 공격적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넘어질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넘어뜨리는’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아포리즘의 공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차주만의 작품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묵시록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일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 종말론적 최후의 심판을 구현한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나는 다소 냉소적(cynical)이고 고집스러운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