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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문화저널]
<테마기획> 내 기억 속 장날 풍경
김사은 원음방송 프로듀서(2004-04-20 15:32:23)
“할아버지 나무 지게에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컸다. 내 눈 높이를 키워주신 분은 바로 외할아버지다. 외할아버지는 첫 손주인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다. 걸음을 막 뗄 무렵부터 '짐빠'라고 불리던 아주 큰 자전거의 앞에 어린이용 보조 의자를 설치하고 태우고 다니셨으니 그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눈 높이가 훌쩍 자란 셈이다. 여섯 살 무렵에는 짐을 싣도록 설치된 아주 널찍한 뒷자리에 앉히고 십리 밖 선산에 데리고 다니셨다. 그 야산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배추며 무, 고추, 콩, 고구마 같은 밭작물을 손수 일구어서 푸성귀를 자급자족하곤 했는데, 마을 어귀에 자전거를 받쳐두고 할아버지 전용 지게로 경사진 밭길을 헤치곤 하셨다. 제법 깊은 산길이었던 모양인지 밭 두렁에 뱀 허물이 늘어져있어 기겁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지게 위에 올려두고 밭길을 오르내리며 산 속에 핀 개나리나 진달래, 철쭉꽃을 꺾어 주시곤 했다. 어쩌다 배추나 무를 거두어들이는 날이면, 내 키는 짐을 실은 만큼 커져서 할아버지 머리보다 더욱 높은 위치에서 읍내를 한 눈에 바라보곤 했다. 장이 서는 날 더욱 풍성하게 수확한 야들야들한 푸성귀는 쿠션 역할을 해주어서 먼 길을 달려도 전혀 엉덩이가 아프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바람을 가르며 요천을 지나쳐 남원 광한루를 오른쪽으로 끼고 다시 한참을 달려 널찍한 공터에 이르곤 했는데, 그곳은 5일장이 서는 대규모 장터였다. 할아버지는 외가 식구들이 먹을 김치 거리를 빼고 성한 것들을 골라 소위 물물교환도 하고, 푼돈이나마 용돈도 마련하셨던 것 같다. 5일장은 어린 내게 있어 새로운 세상이었다. 임금님 진상품이라는 남원 칼, 남원 목기같은 수공품도 5일장에서 보았고, 강아지나 고양이, 염소 등 각종 동물도 5일장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어린이가 셀 수 없는 각종 채소와 공산품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특히 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자리잡은 튀밥 장수는 어린이들의 공포의 대상이자 동시에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아무리 귀를 틀어 막아도 "펑!"하는 소리는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술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대신 과자전에서 센베이나 강정류 같은 과자를 사기도 했으며 큰 유리병에 담긴 왕 사탕을 빼지 않고 사주셨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싼 다음, 노란 주전자에 피를 담아오곤 하셨다. 5일장이 열리는 날 저녁 상차림은 매우 푸짐했으며 선지국 한 그릇에 가족들의 정도 도타웠으리라. 앞집, 옆집에서 연탄에 갈치 굽는 냄새가 피어나는 것도 5일장 저녁 무렵이었으며, 5일장이 서기 전날에는 소풍전야처럼 기대감에, 5일장 밤에는 읍내 전체가 충만감에 들떠있었다. 5일장이 서는 날, 할아버지 자전거는 만물상으로 둔갑했으며 할아버지의 땀에 절은 쉰내와 함께 할아버지 등뒤에서 나의 유년시절도 평화로웠다. 철이 들면서 내게 5일장은 사라져갔다. 더 이상 할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올라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신 할아버지,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터를 찾아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대접해드릴텐데, 못 드시는 술인 줄 알면서도 막걸리 한 잔 권해드릴텐데, 할아버지 등뒤에서 진달래꽃으로 피어난 손녀딸의 행복했던 유년을 들려드릴텐데,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는다. 이제 중년의 손녀는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목쉬게 노래부른다. "할아버지 지고 가는 나무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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