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문화칼럼]
‘원조 예향’ 전주, 무엇을 할 것인가
이원태/ 이원태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연구위원·문화정책팀
중앙대 문화예술학과 행정학 석사(2004-04-20 14:41:29)
전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땅을 음식 맛 좋은 한적한 지방도시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좀 안다는 사람들도 혹자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하기도 하고 판소리로 대변되는 전통예술의 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붓과 종이로 대변되는 文房四友의 생산지, 그리고 그 위에 濃淡과 一筆揮之가 어우러진 선비의 고결함이 물씬 풍기는 기개 있는 고장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전주를 찾는 외지인들은 너나없이 전주비빔밥을 찾고 콩나물 해장국 집에서는 모주를 즐긴다. 국내 굴지의 제지회사와 종이박물관도 있고, 풍남제 기간에는 전국 규모의 판소리 대회가 열리고 대상 수상자는 그 해 최고의 당당한 예술가로 대접받는다.
저 동남쪽 경상도(안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사는 나는 기껏해야 일년에 몇 번쯤 전주를 찾는다. 지난 한 두 해만 되돌아보면 내가 담당하는 연례 행정사업인 전국문화기반시설 관리책임자대회를 주관하기 위해 전주를 다녀왔고, 한국소리문화의전당 행사 참석이나 자치단체의 문화행정을 살피러 가는 일 외에도, <마당>과 같은 지역 언론사가 주관하는 문화기획자 양성 교육에 알량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강사로 참여한 적이 있다. 전북전통문화연구소에서 개최하는 학술토론회에도 참석하였고 그 밖에 전주권에서 열리는 지역축제를 평가하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지방이 좋다며 전주로 내려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CEO인 이인권 대표나, 탁월한 지방행정가인 전북도청 유기상 국장, 민간에서 영입된 전주시청의 전?현직 예술계장이나 지역문화 연구의 마당지기를 자처하는 전북전통문화연구소의 오랜 지기인 송화섭 박사, 그리고 교동한옥마을에 있는 공예품전시관의 백옥선 관장이나 한동안 임실 필봉농악 전수조교 노릇을 하다가 요즘은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말을 갈아탄 이종진 선생과 같이 전주를 무대로 열정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경원동의 <왱이집>으로 나를 데려가서 콩나물 해장국과 모주를 한 사발 내어놓고 이야기가 흥에 겨우면 한가락 읊을 것을 권유하지만, ‘타고난 메주덩이’의 당혹감을 금방 눈치 챈 동석자가 넉넉한 소리로 손님을 대신해서 한 마디 창을 뽑아내고는 빙긋이 웃으며 술 한 잔을 권할 따름이다.
내가 아는 전주는 그런 곳이다. ‘맛’과 ‘멋’과 ‘흥’과 ‘사람의 온기’가 넘치는, 상념에 젖어들면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어릴 때 뛰놀던 풍요롭고 따사로운 그런 고향 같은 곳이다. 요즘에 와서 지난 반세기동안 이 땅에 광풍처럼 휘몰아친 산업화와 도시화로 초래된 지역사회의 피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드높고, 급기야 대통령이 국정철학으로 分權과 自律과 參與를 주창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화정책의 話頭가 ‘지역문화 살리기’로 모아지는 상황이지만, 전주의 지역문화는 이렇듯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살아있는 곳’이다.
그런데, 듣자하니 요즈음 전주에서 가까운 광주에서는 ‘문화수도’ 만들기를 위해 민관학이 힘을 모아 文化首都에 걸맞은 문화시설을 유치하고, 국가 예산과 자치단체의 온힘을 한데 모아 명실상부한 문화도시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이랴. 부산에서는 영화영상도시, 경주와 안동에서는 역사문화도시를 꿈꾸고, 춘천은 인형극과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한 문화산업도시를 구상 중이고, 수도권의 부천에서도 영상산업을 테마로 한 문화산업도시로 가꾸기 위해 행정기관과 학계, 일반시민과 문화단체들이 사력을 다해 힘을 모으고 효과적인 문화도시 만들기를 위한 지혜를 짜내고 있다.
문화도시 만들기가 별건가? 전국의 모든 지역에 사는 국민들이 고루 문화예술의 향취를 즐기고, 문화예술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만한 생산력의 기반을 나눠 갖고, 문화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우격다짐 보다는 자율적으로 시민생활을 규율하고, 퇴폐와 천박한 오락보다는 품격 높은 예술 활동이 풍성한, 그런 곳으로 가꾸어 모든 지역에서 문화 분권이 구현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닌가? 정부는 제도적으로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지역문화발전의 추진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금년 중에 ‘지역문화예술진흥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근거법 제정과 위원회 구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각 지역별로 위원회가 구성되면 행정기관은 과거와 같이 관료제에 충실한 상의하달식 공급행정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고, 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은 지역 문화의 핵심 인프라인 문화시설 구축이나 문화사업 추진을 지역 문화예술인들 스스로 자율적 판단과 시민들의 다수의견에 따라 문화도시 만들기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는 지난날처럼 지방의 문화예산 지원체계도 단위 사업별로, 예산 집행 항목별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부사항을 지정해서 지원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 예산 배분과 공공기금의 지원을 소위 ‘총액 지원제’로 전환하여 우선순위 결정이나 구체적인 예산 사용처를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개선할 계획이다. 경험칙상 중앙정부의 계획이 단기간에 백 퍼센트 시행되기에는 난관과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큰 흐름이 그렇게 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럴 때 지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준비가 부족하여 기회를 놓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를까 우려스러워 하는 소리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고향이 있듯이 마음속으로 꿈꾸는 문화도시는 있기 마련이다. 모든 세상 사람이 메마른 고장이나 삭막한 도시를 싫어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거늘, 광주가 하거나 부산이 한다고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나쁘랴! 바라건대 모든 지역이 문화도시 만들기에 나선다면 그야말로 이 땅 三千里 坊坊曲曲이 온통 문화의 꽃이 피고 예술의 향기가 흐를 것이다. 다만, 그래도 전주는 달라야 한다. 누가 뭐래도 역사적으로 문화적 전통이 여전히 살아있고, 주민의 정서가 가장 문화적이란 평가에 이의를 달 사람이 없고, 예술적 미감이 가장 풍부한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땅이 아니던가?
그런 전주가 남들 다 하는 문화도시 만들기에 선도자역을 자임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문화적 전통과 예술적 소양을 갖춰 오랜 세월 문화를 꽃피우고 문명을 개척해온 학문의 도시 전주에 무엇이 부족한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땅 명창의 절반을 배출한 전주에 사람이 없나? 소리문화의전당을 가진 전주가 문화시설이 부족한가? 전국 최고 수준의 문화행정과 문화재정 투입을 선도하는 자치단체의 역량이 부족한가? 영상위원회와 멀티미디어지원센터 같은 첨단 문화산업의 인큐베이터를 동시에 만든 도시가 전주 외에 또 어디에 있는가?
‘원조 예향’으로 일컬어지던 전주가, 문화적 자산과 문화적 소양이 가장 풍성하고 평균적인 시민들의 문화의식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전주가, 문화도시 만들기를 위해 떨치고 일어나서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문화적으로 전주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지역에서도 시행착오 없이 이 땅의 모든 지역이 문화도시로 가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위에도 불구하고 전주에서 문화도시 만들기의 바람이 불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局外者인 필자는 도시 모를 일이다. 이제 필자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전주를 알고 사랑하시는 전주의 예술인들과 문화활동가,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 스스로 그 대답을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