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문화와사람]
치열한 자기성찰의 시간 속으로
김선경(2004-04-20 14:40:05)
김남곤 前 전북예총회장
정양(鄭洋)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마음 속 괄호 치기'에 능숙한 편이다. 누군가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를 했을 때 "서둘러 마음 속 괄호 하나를 열고" 속으로 비웃거나 무시한 다음 "다시 얼른 괄호 닫고" 그렇겠군요, 하고 짐짓 고개 끄덕이는 의뭉함이 있다는 얘기다. 면전에서는 내 의견을 말하기 거북한 사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 경우 더욱 자주 마음 속 괄호를 치게 된다.
8년 동안 몸담았던 전북예총 회장 자리를 내놓고 홀가분하게 야인의 길로 들어선 김남곤 회장. 그 인품의 아름다움이야 건너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기에 사뭇 조심스러웠다. 그 역시 취재 당하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미 '문건'으로 만들어놓은 게 있다며 그것을 참고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고, 나는 적당히 마음 속 괄호를 친 채 고개나 몇 번 끄덕이다가 오면 될 것이었다. 장소는 전북일보사 7층에 자리한 집무실. 아무리 문건으로 대신한다지만 근간의 소회를 여쭙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밧줄로 몸을 묶어서 정박시켜 놓고 내 안을 성찰하는 중입니다. 그 동안은 몸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일 속에 있으면서도 늘 가슴속을 냉각시키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 동안도 떠벌리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 바람소리, 풀잎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인터뷰는 물론이고 주례청탁이며, 방송출연이며, 이것저것 다 거절하는 중이란다. 전북예총을 떠나면서도 이임식 자리를 갖지 않았다. 준비한 문건 <떠나면서>라는 글을 정기총회 자리에서 낭독했다며 "굳이 뭔 얘기를 더 지껄이겠는가?"라고 되묻는다. 말이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미 하고 싶은 말의 정수는 모두 쏟아놓은 사람에게 굳이 더 '지껄이길' 바라는 것은 무례임이 분명하다. 하여 나는 애꿎은 문건만 뒤적이고 있는데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 몇 마디 덧붙인다. "이제 치열한 문학의 길만 남았지요. 조용하게 그 길을 걷겠습니다. 시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만 가지겠습니다."
기회는 이때다 싶다.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했으니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리라. 예를 들면 어떤 작품활동을 할 것이고, 언제쯤 시집을 낸다든가 하는 식의... 그러나,
"이미 작년에 시집 한 권, 수상집 한 권을 낸 바가 있습니다. 또 나는 언론사에 오래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문인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문인으로서의 치열성을 부여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문학에 대한 질문은 저에게 부끄러운 질문입니다. 그저 한 5,6년 후에나 시집을 내볼까 생각중인데...뭐 그동안 낸 책도 대여섯 권밖에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도 문학의 길 위에서 시와 인간을 성찰한다면 나름의 방법론은 있으리라. 대저 성찰이란 짧은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단 말인가.
"인간은 저마다 타고난 성정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이 왜 이리 갈등스러운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눈물나는 일, 언짢은 일을 못 보는 성정이지요. TV를 볼 때도 호랑이가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그 순간에 꺼버립니다. 그러면 그 동물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잖아요? 나는 죽는 걸 안 봤으니까. 그런 성정이라 추악한 세상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모든 것들이 평화지향적으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걱정한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잘못된 일, 불쌍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비로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속 괄호 따위,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성정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전북문화예술조직의 수장 노릇을 하기가 어디 쉬웠으랴.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짓장을 들어도 힘들다는 사람이 있고 바윗돌을 들어도 가볍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늘 백짓장도 무겁다고 생각하며 자만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후회되는 일도 많죠. 하고 싶었던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만 그럴 때마다 돌파력을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돌파력을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건네준 문건에 보면 "전북예총 회장으로 추대돼 올 적만 해도 96년산 최신형의 동력장치라고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가동률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적 사고에 대응할 만한 능력이 쇠진해버렸습니다."라고 매우 시니컬하면서도 재미있는 비유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동력장치의 가동률이 떨어졌으니 새 엔진으로 교체를 하라는 얘기다.
그는 결코 남의 탓을 할 줄 모르며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응시, 사물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람임이 분명하다. 1966년 지역언론계에 입문, 38년이 지났지만 그는 녹슬거나 노회해지지 않았다. 정년 후 8년 만에 다시 전북일보로 돌아왔을 때 그는 "변화된 시대에 맞지 않는 잣대 하나 가지고 왔다"는 말로 자신의 재입성을 표현했다. 나이 들수록 쉽지 않은 일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아니던가. 그는 지금도 젊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즐기고 농담도 자주 건네고 싶단다. 하지만 상대편 젊은이들의 반응은 썩 시원치 않은 모양이다. "나 스스로 젊은층에 서고 싶고 그들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젊은 사람들은 나하고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고... 하지만 나는 누구 위에 군림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그가 보다 깊은 성찰의 세계로 침잠하기 전에 지역문화계를 위한 고언 한마디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물러났는데 뭐..."라고 접으시려고 하는 것을 "꼭 장(長) 자리에 있어야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거듭 청해보니 평소의 생각 한 자락을 꺼내 보인다. "소리문화의전당 기공식 때 비가 왔어요. 우산을 받고 삽질을 했죠. 그 아름답고 웅장한 전당을 보면서 '전북을 예도니 양반도시니 선비도시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하는데 우리 스스로는 그런 긍지를 느낄 만한 역량을 축적해왔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언제 한번 2천석이 넘는 공연석에 들어간 본 적이 있으며, 언제 한 번 예매문화, 좌석제 문화에 익숙해져 본 적이 있으며, 언제 한번 7천석이나 되는 야외무대를 꽉 채워본 경험이 있는가? 전당이 생김으로 해서 비로소 긍지를 느낄 만한 예술의 산실이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그 전당을 어떻게 채우고 누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인들 스스로 이론을 무장하고 실기도 갖추고 현실참여도 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자질이 충분한 예술인도 있고 부족한 예술인도 있지만 서로 힘을 모아서 예술의 고장을 꽃피울 의지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좋은 장점들과 기능들을 가지고 있으니 치열성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즘 부쩍 안 좋아진 경기를 걱정한다. 좋은 기획이 있어도 주위 여건이 뒷받침 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초극'하면서 '정신세계를 크게 선양'하는 자세를 가져달라고 마지막 당부를 한다. 초극(超克). 그것 뒤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가 따를 것인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일이 다반사인 요즘 풍토에서 그가 던진 몇 마디-성찰, 치열성, 초극, 정신세계-는 산사에서 듣는 법문처럼 마음을 고요히 다잡게 해준다. 법문은 들리는 사람의 귀에만 들리리라.
헌책장사가 전공이에요
그곳에 가는 길은 굳이 얇은 지갑을 걱정스러워 하지 않아도 좋다.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약간의 시간적 여유, 그리고 얼마간의 발 품을 즐거이 감내할 마음가짐만 먹는다면 책에 대한 허기를 마음껏 채울 수 있다. 헌책 매니아들의 순례지, 동문거리 헌책방골목은 그런 곳이다.
그곳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책과 사람들’, 문을 열자 헌책 특유의 냄새가 가장 먼저 반겨온다.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은 물론이고 철지난 각종 월간지, 교과서, 참고서, 값비싸 보이는 호화 양장본 전집, 심지어는 족보까지 진열되어있다. 언뜻 보아도 팔릴만한 책만 무더기로 진열해놓은 웬만한 대형서점보다 더 많은 종류의 책들이 구비되어 있다. 그 헌책더미 저 안쪽에 사장 정윤희(43)씨는 벗과 함께 앉아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순박해 보이는 인상, 언뜻 어눌해 보이는 조용하고 차분한 말투,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얼굴이다. 첫인상만을 가지고 판단해 보건데 일찍이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이 사람은 책방 주인 ‘이데아’의 현신(現身)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책방주인 이미지와 딱이다.
헌책방과의 인연
그의 헌책방과의 인연은 왠지 운명 같다는 느낌도 들거니와 그래서인지 고래심줄처럼 끈질기다는 느낌 또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헌책방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1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새내기 시절. 원래 집이 정읍이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고, 경제적 여건 때문에 마련한 곳이 바로 일명 ‘쪽방’이라고 불리는 방이었다. 한사람 생활하기에도 벅찬 크기의 방이 1층과 2층에 각각 10개씩 무려 20개의 방이 빡빡하게 들어찬, 마치 닭장 같은 집이었다.
이 ‘닭장’에는 가난한 학생들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캬바레에서 밴드연주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구두닦이가 살고 있었고, 채소장수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헌책방주인이 한 지붕아래서 살았다. 밤이면 이웃 방 사람들과 함께 모여 술 마시기를 즐겨하다 보니, 어느새 형님 아우가 되는 것은 동서(東西)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고금(古今)정도는 넘나드는 인지상정. 이렇게 해서 친해지게 된 형님(?)의 헌책방을 들락거리던 그는 차차 헌책방을 봐주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것이 그가 헌책방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다.
“1990년이었어요. 그때 서울에 있는 신일산업에서 2년 간 일하다가 그만두고 쉬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자취방 보증금이라며 400만원을 들고 왔어요. 그 당시에 400만원은 꽤 큰 돈 이였죠. 그 친구의 거의 전 재산이기도 했구요” 학창시절부터 그와 함께 헌책방 순례를 하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때, 그 친구가 그에게 전 재산을 건네주며 했던 말은 딱 한마디, “넌 헌책방이 맞아”. 딱히 적성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그가 비로써 ‘가장 잘 할 수 있는 천직’을 찾는 순간이었다.
책은 안 읽을수록 좋다.
북적거리기까진 않더라도 심심치 않게 손님들의 발길이 오간다. 하지만 대게는 참고서나 공무원교재가 있는지 물어보고는 그냥 휑하니 나가버리기 일쑤다. 경제난이니 실업률이니 하는 시류가 헌책방이라고 비껴 가지는 못하나보다.
“전에는 책방에 들어와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책 구경하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딱히 책을 사지는 않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요즘엔 그런 사람들 찾기가 힘들어요. 전부터 단골들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책을 많이 보는데, 이른바 ‘뜨내기’ 손님들은 거의 학습용 교재나 참고서를 많이 찾아요.” 그렇다고 책 읽지 않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책은 안 읽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책을 안 읽고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좋은 방법이라는 거죠. 3~4년 전에 ‘체게바라’ 열풍이 분 적이 있어요. 이때, 체게바라 전기를 읽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체게바라가 사람이름인지 조차 모를 것 아니에요. 근데 문득 그걸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거에요. 단지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 대한 우월감 내지는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뿐이 아닐까 하는 그런 회의였죠. 그렇게 책을 이용할 바에야 차라리 그 시간에 바다를 보는 것이 낫죠. 책을 읽는 것은 고급문화고 바다에 놀러 가는 것은 저급한 것이에요?” 책을 남들에 대한 우월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지독한 경계였다. 책을 그냥 책으로 대하는 것,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어쩌면 그의 삶의 방식과도 닮아있는 듯하다.
무심(無心) 운영법
그의 이런 생각은 책방 운영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손님이 와도 도통 그 흔해빠진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한마디 없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도 고개 한번 드는 시늉조차 없다. 손님이 무엇을 물어오면 그저 덤덤하게 대답해 주는 것이 전부다. 그의 무심함에 기분 나빠하는 손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손님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이다.
“헌책방 하기 전에 저도 헌책방에 좀 다녔어요. 책은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헌책방에서 많이 봤죠. 그런 때에는 주인의 친절이 참 부담스러웠어요. 돈이 없어서 책을 사지는 못하고 보고만 갈텐데, 주인이 너무 친절하면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그는 책방 주인이 된 후로 손님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책방에는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십 년이 넘는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헌책방 매니아들이 이곳만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오면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간다. 서울에서 출장 내려올 때마다 일부러 이곳에 와서, 책을 사고 그와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시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는 무심한 것 같지만, 될 수 있으면 참고서나 취업용 서적보다는 인문학 서적을 구비하려는 그 나름의 경영 철학이 한몫 한 덕분이다. 헌책방 매니아들이 다른 집에 비해 좀더 오래 머물게 된 것이다.
“저는 누가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책장사’가 전공이라고 해요. 이것만큼 제가 잘할 수 있는 것도 편한 것도 없거든요. 오늘 점심도 평소 알고 지내던 단골 고객에게 얻어먹었는데, 전 이렇게 손님들하고 같이 술 마시고 얘기하는 것이 좋아요. 아마 한량기질이 있나봐요.” 이쯤 되면 ‘단골’의 개념을 넘어서 ‘친구’가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때문에 이젠 책을 가져올 때 누가 무슨 책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이 책을 가져갈지 정도는 다 알 정도가 되었다. 단골들의 책 고르는 스타일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헌책방에 오래된 단골이 많으면 골치 아파요. ‘뜨내기’들이야 이곳에 있는 책이 다 새로운 것들이지만, 단골들은 이곳에 어떤 책이 있는지 다 알거든요. 그래서 항상 새로운 책을 갖다 놔야 하는데, 요즘엔 헌책 구하기도 힘들어요. 헌책에 대한 수요뿐만 아니라 공급도 줄어 든거죠. 항상 새로운 단골이 생겨야 하는데, 요즘엔 그것마저 여의치 않는 상황이구요”
때문에 그는 요즘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이미 ‘헌책’이 ‘콩나물’이나 ‘세금’ 등과 이음동의어가 되어버린 그의 생활과 갈수록 헌책방에 발길이 뜸한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름대로의 자구책이다.
‘人生은 허무하다. 이 덧없는 人生, 우리 人間은 合心協力하여 너도나도 다 같이 人生의 항로를 개척하여 나가자’ -공주에서 씀-
단기 4289년 2월 16일 출판 된 350환 짜리『중국문화사』간지에 단정하게 씌인 글이다. 올해는 타인의 흔적 덤으로 얹혀진, 묵은 누룩냄새 구수한 헌책의 세계에 빠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