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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문금옥/1987년 '월간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해왔다. 한국문인협회(2004-04-20 14:37:05)
'어린 왕자'에 대한 단상 이른 새벽, 격포의 뱃마당은 분주했다. 쫓기듯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위도행 첫 배에 오른 나는 늦게서야 월요일이란 걸 알았다. 육지에 나왔던 현지민들과 직장인들이 서둘러 섬으로 들어가는 행렬에 끼여 나는 뱃삯도 할인 받으며 배에 올랐던 것이다. '한 사흘' 만 혼자 있으면서 철저히 게을러지고 싶다는 일상의 입버릇을 잠재우기 위해서인지 남편은 격포의 한 수련원에 방을 마련해 주었다. 몇 권의 책과 헐렁한 옷 한 벌 챙겨들고 찾아들어 하루를 묵었는데 가까운 위도에 있다는 돛단여, 모여 등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불현듯이 혼자 찾아 나선 위도행이었다. 섬이 되어 우뚝 솟아오르지도 못하고 들물 때면 흔적없이 사라졌다가 썰물지면 슬몃 자취를 드러내는, 서늘한 울음 뒤의 소리없는 추스림같은 '여'... 그러기에 물굽이도 '여'를 넘을 땐 움찔움찔 아파하는 것일까. 내가 '여'를 찾아가는 것은 잊은 듯 살다가도 문득 생생하게 출렁여오는 내 안의 '여'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쉬임없이 달리던 망망한 바다 저쪽에 작은 섬 하나가 보였다. 순간 나는 모자같은 섬이라고 말하려다 얼른 그만 두었다. 그것은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보았던 바로 제 1호 그림이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 영락없이 바로 그 모양의 섬이었다. 위도에 도착한 나는 다행히도 친절한 가이드를 만나 툴툴거리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위도의 해안 절벽들을 샅샅이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임수도라 불리우는 그 섬을 '어린왕자 섬'이라고 혼자서 불러보았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낡고 여기저기 누렇게 어룽진 책 한 권을 펼쳐 보았다. 어린 시절, 저녁이면 가끔씩 집짓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남매들이 함께하던 그 놀이는 닭표나 비사표 네모난 성냥갑 속에 들어찬 성냥개비들을 잇대어, 방바닥에 집을 짓는 것인데, 좁은 방에 서로 큰 집을 지으려고 몸 부딪치며 티격태격하던 일이 스쳐간다. 그 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방까지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같이 살거라고 큰 소리 쳤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흐뭇해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날이 새면 허물어질, 재목이 되어 설 수 없는 허망의 꿈 한 채를 지으며 어머니는 산 넘어 또 산을 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 매곡교 아래 천막을 치고 약장수들이 펼치던 창극에 빠져 학교에 가질 않았다. 약장수 패들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며칠 째 무단결석을 하자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시는 바람에 가출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 일 말고는 별탈없이 자라던 나는 백일장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막내딸이 속내로는 자랑스러웠는지 어머니는 가끔씩 책을 사주셨다.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시면서 내게 건네주신 선물,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였다. 관광지의 가판대에서 뿌연 먼지를 이고 있었던 해적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누워버린 오식활자를 교정부호로 일으켜 세우기도 하면서 연필로 밑줄도 그어가며 그 후로 삼십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활발히 했었다. 교지를 편집할 무렵이면 밤늦게까지 문예실에 남아 원고정리를 하기도 했던 그 무렵 단짝 친구가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들 가는데 나는 늦게까지 문예실에 남아있게 되자 친구는 늘 불만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친구는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수위아저씨가 빈 교실을 둘러보고 아이들을 몰아내는 바람에 교실에 불은 끈 채 숨 죽여 가며 기다려야 했는데 기껏 같이 하는 시간은 기전학교 언덕에서 휘파람재를 지나 다가교를 넘는 짧은 시간인데도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좋았던지 지금은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다는 걸 우리는 서로 잘 알았던 것이다. '가령 네가 네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나는 행복해 지기 시작할 거야.' '별이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꽃 때문이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아.' 우리는 그 아름답고 심오한 구절들을 시처럼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 후로 '어린왕자'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생떽쥐베리의 작품들을 섭렵해 읽기도 했지만 때로는 까마득하게 잊으며 산 적도 있었다. 다시 어린왕자를 찾았을 때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나에게 슬픔이란 발설하지 말아야 할 비밀이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네 살박이 아들 아이를 잃었을 때 나는 지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상을 둥둥 떠 다녔다. 등단한지 채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욕망으로 들 떠 있을 때 생긴 일이고 보니 어미로서의 자책이 안으로만 깊은 구렁을 지었던 것이다. 누구는 시를 써 보라고 권유했지만 꽉찬 슬픔 앞에서는 외마디 비명만이 가장 진실한 표현이었다. 자꾸 내 안으로 침몰하면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게되었다. 그래서 벽면을 꽉 채운 서가를 꿈꾸던 많은 책들조차 아낌없이 정리하게 되었다. 그 때 손 때 묻은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성호를 그을 줄도 모르던 때였고 다시 찾은 '어린 왕자'는 따뜻한 손길로 슬픔에 찬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헤매임 끝에 내 어린 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별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 이 책은 내 머리맡에서 항상 손 닿을 수 있는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리는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한, 내가 지내온 시간들이 무수한 밑금으로 암장된 '어린 왕자'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듯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장은 낡고 남루해 질 것이나 상징을 통한 투시의 눈빛은 더 명징한 빛을 발할 것이다. 기진한 어둠 속에서도 내게 말 걸어오는 별 하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가 새기는 가슴의 빛나는 문양들로 나는 오래 행복할 것이다. 문금옥/전북문인협회 회원이면서 풍물시 동인, 가톨릭 전북 문우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릴레이 추천 : 서석희 신부님(가톨릭센타 홍보국장) - 가톨릭 전북문우회 주임신부님이며 문화에 관한 다양한 코드를 가지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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