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양조위'의 자리에서 엽서를 쓰다
신귀백(2004-04-20 14:35:41)
<<킬링필드>, <툼레이더>, <화양연화>
겨우 며칠, 캄보디아 땅을 디뎠다. 육로로 통과하는 캄보디아 국경에서 만난 풍경은 우리네 자서전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면들 그대로였다. 개조한 자전거의 체인을 손으로 돌리며 국경 너머 태국으로 일하러 가는 그의 발목은 지뢰가 물어갔으리라. 저주받은 땅으로 그려진 영화 <킬링필드>, 그 때 나는 이 영화를 애써 보지 않았다. 제국주의자가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를 무시해 줄 수 있는 나이였기에. 그렇다. 영화 한 편이 주권국가의 이미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크메르 루주의 살육 이전에 영화를 만든 나라가 저지른 참상은 이 영화 한 편으로 묻힌 것이다. 해골만을 모아놓은 와트마이 인골탑에서 그리고 사원의 입구에서 민속악기를 연주하는 장애인들이 들려주는 구슬픈 피리소리를 들으며 나는 감히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자본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 앞에 여체를 끌어와 오리엔탈리즘의 카메라를 들이댄다. 3류 배우 이지현의 누드가 그렇고 안젤리나 졸리의 영화가 그렇다. <툼레이더>는 여배우의 몸매 외에는 볼 것이 없는 영화지만 그 배경이 되는 따 쁘롬 사원의 기둥이 주는 스케일과 섬세함은 감동이다. 그러나 그 감동을 오래도록 각인시키는 것은 사원의 부조물이 아니라 신전의 돌기둥을 감싸는 밀림의 나무뿌리가 아니던가. 저 멀리 하늘과 교신하려는 듯 우뚝이 솟아 그늘을 만드는 자이언트 팜나무가 돌기둥을 친친 감고 있는 모습은 이곳 유적이 지닌 인간 욕망의 허망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옛날 신과 자신을 동일시한 교만한 그 왕들의 현시욕은 나무뿌리에 엉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한 톨의 씨앗이 사원의 탑에 자리를 잡고 저 큰 나무가 되어 그 왕국의 영화를 감싸안고 또한 흔들면서 이렇게 800년의 세월을 말없이 견딘 것이다. 이 침묵의 사원은 거의 보수가 되지 않고 무너진 것은 무너진 대로, 약탈의 흔적은 흔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김용택이 "저 섬진강 물이 어디 애비애미 없는 후레자식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일갈한 것처럼, 싸가지 없는 서양 오랑캐 몇 놈이 불두와 압살라의 조각들을 뜯어갔다 해도 사원은 폐허대로 의연하기만 했다. 나는 그 옛날 크메르의 위대한 보석 앞에서 맨발로 "원 달라"를 외치는 아이에게 기념엽서를 샀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그 긴 회랑의 부조들은 하나 같이 너무 많은 역사와 철학들로 채워져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도 있지만 힌두교의 서사에 관한 사전지식이 부족하다 해도 앙코르와트에는 이해 받기 전에 전달받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한데, 저 높은 사원의 탑 날개에 애인의 무릎을 베고 쉬는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화다. 평화가 깃들인 곳에 신이 있는 것이다. 내게 일 주일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코스에 따라 움직이는 패키지 여행은 저들처럼의 평화와 안식은 없다. 수백 년 적멸의 폐허가 안식의 기쁨을 주지 못한다 해도 바쁜 나그네에게 성벽의 상처들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한다. 앙코르와트를 스친 왕가위도 여기다 사련을 투사한 것이리라. <화양연화>의 슬픈 나그네 차우가 만졌던 남국의 돌탑이 주는 체온은 따뜻했다. 크메르 왕국의 비밀을 담은 앙코르와트 석조 건물 구멍에다 사랑의 비밀을 불어넣고 진흙으로 봉인하던 양조위의 자리에서 나는 엽서를 썼다.
저무는 캄보디아 들판의 광활한 풍경들은 너무도 무심하여 어디 한 곳에 눈 둘 데가 없다. 수직으로 솟은 야자나무만이 끝없는 지평선의 단조로움을 견딜 뿐. 이 권태로운 풍광을 이기려고 그들은 엄청난 돌로 성과 탑을 산처럼 쌓아 올렸으리라. 돌아오는 차안에서 저무는 들판의 잔광을 돌처럼 바라보던 박남준은 단편영화를 한 편 찍고 싶다 했다. 산이라고는 전혀 없는 들판에 한 노인이 소를 몰고 간다. 이따금 자동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가고,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고, 스치는 비가 들판을 훑고 지나가고, 그 비 아래를 우산도 안 쓴 아낙이 지나가는, 그런 적멸을 담은 아주 지루한 영화 말이다.
엽서는 일 주일 늦게 도착했다. 그림 속의 앙코르와트 탑을 보며 해 뜨기 전 절을 올리지 못한 용렬함에 나는 돌아와 가슴을 친다.『문화저널』식구들 혹시 '백제기행'으로 앙코르를 정하신다면, 부디 새벽 탑 앞에서 백 배(拜)를 올리시라. 맨발 아이들의 빈손을 위하여 한국의 맛있는 사탕 가지고 가시라. 헌 옷 가져가시라.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