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교사일기]
졸업식 풍경 2제(題)
한상기 완주 봉서초등학교 교장(2004-04-20 14:31:10)
풍경 하나 : 울음바다가 되었던 졸업식
반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누구나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교육환경도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교실은 마루도 없는 흙바닥이었고, 교구(敎具)라야 낡은 칠판에 백묵 몇 자루가 전부였으니 지금 어린이들은 짐작하기도 어려우리라.
수업시간은 언제나 한 시간에도 몇 번씩 깨알같은 글씨로 칠판 가득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판서를 해주셨다. 아이들은 혓바닥이 부르틀 정도로 연필심을 침으로 발라가며 빛 바랜 막 종이공책에 베끼고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는 분필 지우개를 터는 당번까지 있었으니까. 지금의 넘치는 풍요가 해악(害惡)이 되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안타까움이 아니리라. 어찌 그 뿐이었던가. 추운 겨울에는 부모들이 몇 지게씩 가져다 준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고 매캐한 연기를 맡아가며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때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슬로건이 있었고, '배워야 산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있어서 가능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도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빛나는 졸업장을 그런 통과의례를 거치고서 받았다.
졸업식 날이 가까워오면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리고 부모들까지 헤어지는 서운함을 몇 날 며칠 씩 곱씹으며 못 다한 정들을 나누느라 바빴었다. 아이들은 몇 명씩 떼지어 친구 집에서 함께 기숙하며 정을 나누었고, 부모들은 가난했지만 씨암탉까지 잡아 선생님들을 대접하면서 그간의 노고에 감사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어머니들의 열성으로 졸업생 집집마다 쌀 몇 됫박씩 거두어 동창 계(契)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으니, 옛 어른들의 상부상조의 전통을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졸업식 날, 뭐니뭐니해도 행사의 백미(白眉)는 송사, 답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전부터 몇 번씩이나 예행연습을 했어도 그 날은 슬픔이 북받쳐 제대로 읽질 못했다. 매년 비슷한 내용이었다. '6년 전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로 시작해서 '정든 교실, 만국기 휘날리던 정든 운동장,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자니….'쯤 오면 한두 명이 울기 시작하는 순간, 졸업생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었다. 어디 그 뿐이던가. 뒤에 서 계시던 학부모들도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고 동네의 큰 어른이신 사친회장님도 내빈석에서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셨다. 그래서 졸업식장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해버렸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너나없이 함께 흘렸던 눈물은 무엇을 의미했던가? 반 백 년의 긴 세월 동안 가끔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에겐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본래 순백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민족이라 그랬을까? 아니면 전란(戰亂)의 고통 때문에 겪었던 좌절과 증오의 감정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흘린 눈물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희망으로 자라나는 자녀들을 바라보는 기대가 벅차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졸업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그 시절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우리나라가 새롭게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거나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요즘처럼 어렵고 시끄러운 세상에 옛날 같은 '울음바다 졸업식'을 다시 볼 수 없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풍경 둘: 내 손으로 준 졸업장
옛날에는 자녀 많이 두는 것을 제일 가는 큰 복(福)이라 했다. 일손이 부족해서 그랬을까? 낳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낳아서 크는 대로 기르고, 장성하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농사짓고 오붓하게 사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으니까.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산골 오지에서 보기 드물게 남다른 생각을 갖고 사신 선각자였다는 생각이 들어 자랑스럽다. 우리 아버지는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셨다. 집안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었다. 8남매나 낳아서 기르시느라 남들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셨으리라.
그 시절만 해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한 반에서 한 두 명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전주로 유학 보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께서는 8남매 모두를 전주로 유학을 시키셨다.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가르쳐 보니까 아버님의 노고를 이제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주자(朱子)께서 말씀하신 불효부모 사후회(不孝父母 死後悔)라는 생각이 들어 억장만 무너져 내릴 뿐이다.
형편이 어려워서도 그랬을 테지만, 아버지께서는 자녀 모두가 선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셨던 모양이다. 8남매 중 네 자녀를 사범학교에 입학시키고는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세상에서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거란다. 암, 가장 중요한 일이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선생이 되거라. 그러려면 항상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고 살아야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학교 밖을 나가보지 못하고 길고 긴 세월을 선생으로 살아왔다. 젊어서는 웅지(雄志)를 펴보지 못하고 선생으로만 사는 것을 많이 후회했던 시절도 있었다. 남들이 우리를 옹졸하다며 사시의 눈빛을 보낼 때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세월은 흐르는 것. 강산이 네 번도 더 바뀌는 세월을 한 곳에서만 살다보니 나에게 '교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어려움도 많이 있었다. 어려웠던 것만큼 보람도 큰 이 자리에 별로 한 일도 없이 6년째나 이렇게 엉거주춤 서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을 해보니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짐은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 것일까? 긍지를 갖고 최선을 다하며 충실히 노력해야 하리라.
며칠 전, 열 여덟 명의 졸업생에게 내 손으로 내 이름이 박힌 졸업장을 주었다. 졸업생이 400명씩이나 되었던 전임 학교에서 있었던 졸업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감회도 새로웠다. 하나도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없었다. 학부모도 내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반 백 년 전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이들 하나하나 손을 꼭 잡아주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나이, 어리다면 참 어린 나이겠지. 겨우 열 두어 살배기 애들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겠느냐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을 느끼는데 나이란 별 상관이 없다. 열 살에는 열 살만큼, 일흔 살은 일흔 살만큼 그 만큼씩 느낄 수 있는 인생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졸업은 단절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냥 쭈욱 진행되는 과정이라고도 말했다. 그 속에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낭만도 있고, 고통도 있고, 욕망도 있고, 좌절도 있고,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으리라.
내 손으로 졸업장을 준 아이들이 먼 훗날 지나온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나와 함께 나누는 날이 있게 되기를 빌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졸업장을 주는 일이야말로 '교장'으로서 가장 보람찬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