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서평]
'광폭한 열정'의 기원지는 어디인가
김형미/1978년 부안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00년 전북일보 (2004-04-20 14:17:03)
『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
환절기. 문득문득 모든 걸 파괴하고 싶고 부숴버리고 싶은 욕구가 아주 강하게 일어나곤 한다. 평범한 일상과, 그 일상의 사각진 틀, 그리고 사람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나날들과, 좋든 싫든 서로 부대끼며 유지해온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내 목숨까지도.
그러한 다소 광포한 욕구는 어쩌면 태초부터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자라오기라도 한 듯 침잠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나 자신마저 놀랄 만큼 강한 힘으로 밖으로 뿜어져 나오곤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한 계절이 한 계절로 옮아갈 때, 휘영청 달무리 얼크러진 빛이 처마 밑에 무더기로 져 내리거나, 생에 대한 의욕과 함께 밥맛까지 잃게 되고 딱히 대상도 없는 그리움에 온몸이 사무치게 아플 때. 그럴 때면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저녁의 어둠만큼 넓어진 내 오감을 통해 흡사 적개심 강한 분노처럼 끓어오르는 것이다.
하여 때로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지 못할 정도로 극단적인 단계로까지 치달아가는 불안과 공포를 내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 조금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템포 빠른 리듬을 타는 엽기성이 동반된 그 불안과 공포는 자아의 치유되지 못할 어떤 결핍으로 확대되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을까. 매시간마다에는 우리가 미처 손쓰지 못할 도무지 참아내기 힘든 순간순간이 전갈의 맹독처럼 숨겨져 있다는 것을. 무언지 끈적하고 우울하면서도 어디에서고 폭동이라도 일어날 듯 살기등등한, 폭풍이 쏟아지기 직전의 바람 냄새가 느껴지는 그 순간을 참아내기 위해 그처럼 기이하게 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김도언의 단편집 [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 속의 여러 주인공들은 모두들 그런 자못 위험한 순간순간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들의 성격은 하나같이 극단적이다. 어딘지 쇠꼬챙이처럼 날카롭고 예민한, 털털하면서도 첨예한, 하여 자칫 방심하면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 장담하기 힘든 불안감과 연민을 동시에 조성하는 주인공들. 극단적인 만큼 그들의 행동은 지나치리만큼 무모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주인공들이 이런 성격들을 가지게 된 건, 선천성에서 오는 결함이라고 치부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나는 오래도록 "몸 밑바닥에 은밀히 스며 있으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회유하는 자유, 도피, 해방, 환각의 욕망"([부주의하게 잠든 밤의 악몽]에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이성적인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치를 떠나 있는 자신을 또다시 치졸하게 지배하려 드는 감정에서 주인공들은 단 한 번이라도 탈주하고 싶은 것이다. 혹은, 탈주와는 반대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병적일 만큼 집요하게 파고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때에 따라 누구에게나 숨겨져 있는 악마성을 과감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드러난 악마성이 주는 묘한 쾌감과 짜릿한 승리감. 그렇다면 이런 "기형적이고 환상적인 것, 어떻게 보면 피카소의 어떤 그림을 연상시키기도"([Empty Rooms]에서)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광폭한 열정"의 기원지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까닭 모를 우울과 내밀한 그늘이 퍽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매력이면서 동시에 공포로 다가"오는 것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깊이 매료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나는 그러한 주인공들의 기이하게 어긋난 행동을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던 고독, 지독한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면서 여전히 타인은 타인일 수밖에 없고 자신 또한 상대방에게는 타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가장 가까운 곁에 두고 있다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누구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듯 어쩔 수 없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이 냉혹한 세상.
때문에 김도언은 [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의 도입부를 쇠라의 그림으로 장식했는지도 모른다. 얼핏 보기엔 단조로울 정도로 화사한 평화로움과 다정함이 깃들여 있으나 각각의 인물들은 무척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잔디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나란히 걷고 있는 남녀마저도 서로를 응시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각자 보는 것만 보고 있을 뿐. 하여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마음속에 어떤 감정을 묻어두고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쇠라는 어쩐지 엄숙함마저 감도는 냉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는지도. 거기에다 서로서로 단절된 내면이 풍기는 금속성과 같은 차가움. 그러한 풍경은 조금만 건드려도 실외에 세워둔 조각상처럼 금방 조각조각 떨어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 아슬한 고요가 주는 불안함.
김도언의 소설에선 이러한 불안이 철제 계단이 텅, 텅 울리는 소리로 묘사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주인공의 내면은 금속성을 긁어내는 것처럼 날카로워지는 위태로움까지 드러낸다. 이렇게 철제 계단이 텅, 텅 울리는 소리나 주인공의 날카로워지는 내면 세계는 약간의 기술적인 차이를 두고 단편으로 이루어진 그의 소설 전체에 농후하게 퍼지고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까지도 내 귀엔 예의 그 철제 계단의 울림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마도 그 소리는 그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든 아니든, 또한 그의 책이 놓여 있는 이 책상 위에서든 혹은 이 책상을 떠나 어디에서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절실하게 들으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해질녘 육교 위에서, 직장에서 일하는 짬짬이, 여러 사람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리고 부부가 함께 하는 잠자리에서마저도.
이런 맥락에서 김도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의,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한다. 앞을 못 보는 장님 흉내를 낸다든가, 유명한 텔런트가 되어 변심한 애인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계획한다든가, 형의 애인을 사랑한 나머지 형을 죽이려는 음모를 세운다든가, 그도 아니면 모든 상황을 그저 의도적으로 방치하여 밑도 끝도 없는 방황으로 스스로를 자학한다든가 하며 그들은, 혹은 우리는 나름대로 가장 자기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 농축되어 고여 있는 고독이 빚어내는 오기이자 독기로써. 전염성과 마약성이 강한, 아직 채 드러나지 않은 악마적인 면과 함께. 그리하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광폭한 열정으로 다른 사람의 빈방을 탐할 때 나의 방도 비어져서 나를 닮은 다른 사람에게 탐해질 수 있"다라고 엉뚱한 위안을 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