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 [문화시평]
도전과 실패에서 꽃 피는 또 하나의 예술 판소리 오페라
유장영/전북대 대학원 음악학과를 졸업했다. 전통음악극 <그리운 논개&g(2004-04-20 14:09:36)
도전과 실패에서 꽃 피는 또 하나의 예술
판소리 오페라 <달하 노피곰 도다샤>
'판소리오페라'는 우리의 판소리를 서양의 오페라에 접목시킨 것이다. 당연히 호기심이 발동한다. 동시에 의문도 생긴다. 판소리는 그 자체로서 극적인 요소가 강한데다가, 이미 창극이라는 고유한 음악극으로 발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페라에 판소리를 접목한다? 그게 가능한 일이며 과연 효과 있는 작업이 될까?
접목(接木)은 번식시키려는 식물의 눈이나 가지를 잘라내어 뿌리가 있는 다른 나무에 붙여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때 접을 하는 가지나 눈을 접지(枝) 또는 접순이라 하고, 접수의 바탕이 되는 나무를 대목(臺木:stock)이라 한다. 그러니까 판소리오페라는 오페라를 대목으로 삼아 판소리를 접지시킨 새로운 품종인 것이다.
이 일을 가장 앞서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추진하고 있는 사람이 전주소리오페라단의 우인택 단장이다. 매사를 소처럼 뚝심있게 밀어 붙이는 그가 있었기에 이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판소리오페라는 일견 독특하고 경쟁력 있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무모할 정도로 힘든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판소리와 오페라, 본질적으로 이 둘은 전혀 별개의 토양에서 자란 매우 다른 형질의 성악이 중심이 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이 둘의 접목으로, 식물에서와 같이, 원하는 품종을 단기간에 대량으로 키우고, 튼튼한 뿌리를 내린 대목에 접지시켜 풍토에 쉽게 적응시키고, 노목(老木)의 품종갱신을 이루는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19세기말까지 계속되던 팽창주의 문화는 20세기에 들어 다양성의 시대로 진입했다. 또한 크로스 오버 혹은 최근의 퓨전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질적인 문화마저도 물리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 함께 섞여 새로운 장르로 발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고 있는 판소리오페라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오페라 양식으로서 등장할 가능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지난 2월 7일과 8일(전주), 그리고 20일과 21일(정읍)에서는, 정읍시에서 주최하고 전주소리오페단이 주관한 판소리오페라 정읍사 <달하 노피곰 도다샤>(작곡/지성호, 대본/김정수, 지휘/이일규, 안무/김현정, 연출/이명호, 합창/정읍시립합창단, 반주/무지카 까메라타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공연되었다.
전주소리오페라단에서 <진채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도한 판소리오페라이다. 이 공연은 2003년도에 무대지원사업으로 추진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 정읍시의 지원으로 마침내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단 몇 줄에 불과한 백제가요 정읍사가 보다 구체적인 배경과 인물과 역사적 사건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틀에 밀어 넣으려는 시도 탓인지, 이야기를 축약하는 연출과정에서 발생한 일인지 모르나, 시간과 장소를 건너뛰는 1, 2막의 전개는 어딘지 모르게 산만하고 부자연스럽다. 후반부인 3,4막에 이르서야, 사랑과 이별과 기다림과 절망의 정읍사 본연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비련의 주인공들 모습이 뚜렷이 부각되며 이에 따라 전체적으로 극이 힘을 얻게 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에서는 우선 듣기 좋은 곡이 많았다. 특히 독창과 중창 중에 좋은 곡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곡들을 뒷받침하는 연출의 효과에 밀도가 더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극음악에서 음악은 음악 외적인 도움으로 더욱 빛이 나지 않겠는가?
반면에 합창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정질노래'와 같은 민요풍의 노래에서는 연습이 부족한 모습이 역력했고, 연기나 표정에도 좀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양곤의 선율을 받아 펼쳤던 피날레 곡에서는 혼신을 다하는 연주로 감동적인 대미를 장식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전반부 월영의 독창 그리고 양곤과의 이중창에서 드러나듯이, 7음계와 같은 좁은 간격의 선율을 표현할 때 판소리꾼의 목소리는 특징을 잃는다. 오히려 월영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불렀던 아리아와 같이 판소리 고유의 선율이 주어질 때 소리꾼의 소리가 제 빛을 발하게 된다.
양곤역을 맡은 김선식은 특별히 우리 언어의 정확한 표현에 큰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그 성음이 판소리로 말하자면 곰삭은 데가 있어서 서민적이다. 따라서 양곤역에 아주 잘 어울리며, 판소리오페라에는 언제나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느낌을 준다.
월영역의 배옥진은 다른 소리꾼과 달리 고음역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 성음이 곱고 여린 점이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다. 아무래도, 극적인 변화에 걸맞는 표현을 위해 성음의 변화와 표정이 좀더 풍부한 소리꾼이 필요했지 않았나 싶다.
턱을 잔뜩 끌어당긴체 지나치게 큰 공명에 의지한 발성은 가사의 전달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사실적인 발성이 바탕이 되는 판소리를 오페라와 자연스럽게 접목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희생과 노력이 동시에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서양성악가들도 공명을 약간 죽이면서도 딕션이 정확해지는 판소리적 발성법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일상적인 대사로 할 것인가 아니면 레치타티보로 처리할 것인가? 이 둘 사이를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연극배우가 함께 공연하게 되어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 무대에서 대사 처리에 대한 방식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은 좋은 모습일 수 없다.
열악한 제작비의 탓이 크겠지만, 무대제작이 전반적으로 조악하였던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막에서 2막으로 무대가 전환될 때는 관객들이 커다란 전면막을 보며 4분이라는 시간을 마냥 어둠 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무대 전환을 위해 불가피했다면, 음악 연주와 함께 미륵사 공사 현장에서 정윤돈의 사가로 내려오는 군중 장면을 막 앞쪽에서 연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페라와 같은 대형 공연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군다나 열악한 환경에 허덕이는 우리 고장의 민간단체에서 이런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커다란 자랑이고 성과이다. 힘들게 작품을 올리면서 하나 둘씩 쌓여가는 노하우도 있다. 이런 시도가 어떤 결과로 귀결될지 아직은 확신하기 어렵지만, 도전과 실패가 거듭되면서 생명력을 얻고 이 시대의 가치있는 예술이 만들어져 가는 것을 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앞으로 더욱 보완되어 이들 작품들이 경쟁력 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상품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