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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 | [서평]
그를 지탱시킨 것은 사람이었네
최인화/1973년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화와 인권연대, 정보통신연(2004-03-03 19:41:18)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황대권의 유럽인권기행』 최인화 / 전북인터넷대안신문 <참소리> 기자 공교롭게도 황대권씨의 책을 읽고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때는 평소 절친하게 지내며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두 선배가 노동시위 관련 죄목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는 동기 하나가 공공기관의 성추행에 항의하는 싸움을 벌이다 되려 법정구속이 돼 교도소에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예년보다 추운 겨울,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복을 두 겹씩 껴입는다고 웃으며 말하다,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던 선배의 주소를 알려 달라더니 그만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만 친구의 얼굴을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보았다. 짧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서점에 들러 황대권 씨의 책을 샀다. 1985년 미국 유학 도중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황대권 씨. 옥살이 중 야생초 화단을 가꾸며 이름 모를 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린 그림, 그리고 복역중의 생활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편지를 모아 펴낸 책 『야생초 편지』(2002)는 많은 이들에게 삶과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게 했다. 출소 후에도 생태공동체운동센터를 세우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저자를 만난 것도 『야생초 편지』를 읽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야생초로 김치 담가먹는 것'을 알려줬던 전주에서의 한 작은 강연회였다. 강연회에서의 저자는 실패를 모르던 엘리트 유학생이 간첩으로 낙인찍히게 된 연유와 한평 남짓한 독방에서의 고독과 재소자 인권향상을 위한 싸움 등을 힘차고 또렷한 어조로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그의 중심가치는 '흔하고 하찮은 풀로부터 삶의 철학을 얻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작년 말 펴낸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은 내가 야생초에 의지하여 그 혹독한 옥살이를 이겨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야생초보다도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힘'으로 견뎌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역설한다. 가족들 외에는 서신 한통 제대로 허락되지 않았던 수감생활 중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이들로부터 받게 된 애정이 담긴 편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의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 펜클럽 회원들과의 서신교환은 홀홀단신 독방에서의 유일한 '사회적행위'였고 이것은 국경을 넘어 영혼의 공감을 느끼도록 하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보살핌이었다. 책은 저자가 출소한 후 귀농생활을 하다 아주 우연하게-저자는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엠네스티의 초청은 13년간의 저자 자신과 수많은 이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유럽여행을 하게 될 기회를 얻으며 길게는 8년간 서신교환을 했던 이들의 얼굴을 맞대게 되고, 편지를 통해서만은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을 담았다. 저자가 수양어머니라 부르던 영국의 아일랜드인 로쉰과 그의 가족들, 미지의 남성의 출현으로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얻게 되었을 프랑스의 중년여성 도미니크, 네덜란드의 게이 작가 윔 잘, 노르웨이의 씩씩한 독신 여성 키르스티 등. 그들 스스로도 '편지'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양심수가 사회로 나와 자신들을 만나러 온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감동이었겠는가. 서신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이들과의 반가운 해후 외에도, 안동교도소 수감 당시 교화를 담당했던 한국인 수녀와의 프랑스에서의 우연한 조우, 예정에 없던 프랑스 농부를 만나 알게 된 '사진 몇장으로는 알 수 없는' 프랑스 농부의 삶 등 여유있는 여행에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다. 또 야생초 전문가에, 회화예술에 조예가 있는 다방면에 능력이 뛰어난 저자가 유럽 각국의 식물원, 미술관, 야외공원 등을 돌며 접한 식물과 예술품들에 대해 저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풀이를 읽어나가다 보면 필자와 함께 그 여행에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영국에서의 정식유학 전 1년여간의 유럽여행은 이렇듯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고, 저자가 일관되게 바라보는 것은 '운동'이라는 거창한 수식어 없이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은 그들의 자원활동이다. "한국에서는 우리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하는 일 말고 이런 형태의 자원활동을 '운동'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인권운동을 한다', '환경운동을 한다' 하면서 스스로 대견스레 생각하고 남과 비교해보곤 한다. 그러나 윔을 보면 그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는 일주일 중 정한 날짜가 되면 세계의 양심수들과 해당 정부에게 편지를 쓰고 관련 사항들을 점검한다. 우리가 운동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에겐 당연히 해야하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 책 168페이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이국땅의 양심수에게 정성어린 마음을 담은 편지 한통을 쓰는 것에서부터, 단체활동을 위한 길거리 모금활동, 피부색이 다른 입양아와 스스럼없는 한가족으로 지내는 것이, 저자가 만난 이들에게는 특별한 결단이나 남다른 희생이 아닌 하루일과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 그들이 보낸 소소한 편지 한통과 네트워킹이 저자의 힘겨운 옥살이를 버틸 수 있게 했고, 정부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며 재소자 처우개선과 양심수의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커다란 힘이 됐던 것이다. 여행을 통해 저자는 '하찮은 풀'로부터 배운 생태적 가치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인권의 소중함에 대한 해탈로 공동체적 가치를 깊숙이 더하게 된 듯하다. 받은 사랑의 크기만큼 세상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저자가 정의내린 인권운동은 각박한 생활에 휩쓸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잊었던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 "교사, 공무원, 주부들인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시민의식이 높거나 정치의식이 별난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인권이 짓밟히고 있는 나라의 양심수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운 좋게 잘사는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게 전부이다. 아렌달에 와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인권운동이란 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님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누군가 부당하게 그 평등성이 짓밟혔을 때 그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느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인권운동이라고 정의하면 너무 단순할까?...(중략)... 측은지심이 사라진 사회에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리가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인간회복이 우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다 읽은 후 감방에 갇혀있는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던 어설픈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문방구에 들러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샀다. 온기가 돌지 않는 감방에서 차디찬 겨울을 나야 할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건 작은 정성을 담아 손으로 적은 편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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