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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 | [문화저널]
<최승범의 풍미기행>뱅어무침의 선득거린 맛
고하문예관 관장 (2004-03-03 19:34:18)
뱅어를 읊은 두시(杜詩) 한 수가 떠오른다. 제목은 '白魚(백어)'. '희고 작은 것이 무리지어 살거니/다 자라서도 두 촌 크기의 고기러라/미세하여도 수족에 딸린 것을/풍속에선 동산의 나물로 친다. (白小群分命 天然二寸魚 細微添水族 風俗當圓蔬) 뱅어를 '나물'이라 하고 먹는 풍속은 우리나라에도 있어 왔다. 주로 동해변에서 풍파에 밀려 풀밭에 오른 뱅어를 '초어(草魚)'라 하고, 승려들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다. 두보(杜甫)는 저 시에 주를 달아 '중국의 정주(靖州) 풍속은 거상(居喪) 중에도 뱅어로써 나물을 삼는다'고 하였다. '뱅어는 희고 맑음이 수정빛 보다더 더하다'(瀅白通身賽水精) 의 시구도 전한다. 이 깨끗한 고기를 내가 처음 맛본 것은 1950년대의 중엽 군산에서였다. 밥상에 오른 '뱅어국'을 권하며, 친구는 '시원하고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고 했다. 처음엔 선뜻 수저가 가지 않았다. 뽀얀히 맑은 국물에 미꾸라지 정도의 은빛 돋는 고기가 통째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다가 국물을 떠먹어 보니, 친구의 말마따나 여간 구수하고 시원한 맛이 아니었다. 고기 또한 바닷고기답지 않게 비린기가 전혀 없고, 사근사근 연하기까지 하다. 모두가 알쟁이였다. 친구의 설명인즉, '뱅어는 해안의 바닷물에서 자라며 이른 봄철 하구로 거슬로 올라와 알을 낳는다' 고 한다. 그 후 봄철이면 '뱅어국' 맛이 그립기도 하였으나, 오늘날까지 다시 챙겨볼 기회를 얻지 못 하였다. 그 대신 시내의 '백만회관'(272-0100) 등 한식집에서 더러 뱅어젓을 맛볼 수 있었고, 한동안 식품점의 '뱅어포'라는 것을 술안주 삼아 먹어 보았으나, 저 '뱅어국' 맛은 되챙길 수 없었다. 지난 소한 무렵의 일이다. 서유구(1764-1820)에서 뱅어는 '동지 전후'가 제철이라는 구절을 보고, 불현 듯 뱅어 생각이 일었다. 마침 일본에서 온 가야누마 노리꼬(萱沼紀子) 교수와 함께 양경화 시인의 차편을 이용하여 부안행을 단행하였다. 부안의 '낭주식당'(부안읍 동중리 4구, 584-2311)에 가면 제철의 빙어를 맛볼 수 있으려니 싶었기 때문이다. 저 식당은 한해의 여름철과 또 한 해의 가을철에 한번씩 들러본 바 있었다. 음식이 깔끔하고 몇 가지 젓갈도 그저 짜고 매운 것이 아니었다. 혀에 안기는 맛이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한 사람당 5천원의 백반상인데, 갓 건저낸 것처럼 싱싱한 뱅어가 올라 있지 않은가. 생굴을 비롯하여 게젓·꼴뚜기젓·홍어무침·명태무침·실치조림·꽁치구이·목무침·버섯볶음·시금치나물·생채·김치·동치미·청국장 등 여남가지의 찬이 놓여 있다. 다 제쳐놓고 뱅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 뱅어젓. 을 챙기자, 여주인(박순념·67)은 '젓을 담아서 몇날만 지나도 미끄러워 못 쓴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뱅어를 금방 무쳐 낼 수 있다'고 했다. 값은 한 접시에 1만원. 입안에 넣자 설설 녹는 맛이다. 신신하고 고소하기까지 하다. 위·아랫 이 사이의 느낌도 선득선득 향기롭기만하다. 가야누마 교수도 저분을 자주 보낸다. 뱅어(시라우오) 요리 몇 가지와는 다른 '깊은 맛'이 돋는다고 했다. 식대 2만5천원을 지불하고 전주까지 돌아오는 길, 세 사람은 뱅어 맛의 예찬으로 거리감도 잊었다. /고하문예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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