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한상봉의 시골살이]
<한상봉의 시골살이>남은 것은 사랑뿐
농부(2004-03-03 19:33:09)
형이 마지막으로 병원 문을 나서던 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형수가 퇴원수속을 밟는 동안에 형은 먼저 로비로 내려와 창을 통하여 보여지는 눈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연신 문을 여닫고 병원으로 들어오고 병원에서 나가고 출입이 잦았다. 형은 휠체어에 앉아 그저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분주한 삶이 이제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을까? 고단한 인생이 그만 형과는 인연이 멀어지고 있다는 조짐이었을까? 형의 시선은 멈추어져 있었다.
사흘 밤을 넘기지 못하고, 형은 추운 겨울날 새벽에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이년 동안 몸이 지칠 때까지 끌어오던 투병(鬪病)생활을 본인이 거두어들인 것이다. 형의 시신은 김해 시립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바수어져 나왔다. 이제 그의 눈빛도 꼭 다문 입술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형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객지에서 살았다. 공부를 마치고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로, 부산에서 결혼하여 경남 김해에서 줄곧 살아오면서, 직장과 성당 사이를 오가며 '참으로' 부지런하게 살았다. 가족들은 모두 서울과 인천에서 살고 있었고, 형은 명절에나 겨우 인천 어머니 집에 다녀갈 수 있었는데,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불어 살고 싶다고 하셨던 둘째 아들이었다.
형제들과 처자식은 또다른 것일까? 형은 부산에 사는 처가식구들과 피붙이보다 더 가깝게 지냈지만, 마음 한 쪽에선 고향에 사는 형제자매들의 육정(肉情) 또한 그리워했던 것 같다. 객지생활이 주는 긴장을 풀어주고, 있는 그대로도 관계맺음이 가능한 관계가 혈육인 탓이다. 형은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에서, 전주에서, 인천에서 보냈던 이년 동안의 투병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던 이십 년의 거리를 좁혀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진통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다가도 누나들이 병문안을 오면 얼굴빛이 밝아지곤 했던 형은, 우리 모두가 결국 얼마나 사랑을 바라는 존재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형의 시신이 화장터의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 형수님이 던진 마지막 말 역시 "여보, 사랑해…"였다. 우린 사랑 받고 사랑하고 싶어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형의 흔적은 경주 인근의 가족묘지에 묻혔다. 생전에 형과 깊은 교감을 나누던 장인어른의 묘 가까이 형을 모시던 날은 궂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삼우제를 지내던 날, 묘소에서도 비가 내렸다. 형은 죽어서도 자신의 음성을 가족들에게 전달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처가 식구들의 극진한 정을 느끼면서, 그래도 형이 충분한 사랑 속에 있었음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형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부산식구들과 인천 식구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공간적 거리를 정서적으로 묶어주고, 남은 날들을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형은 이승을 떠났고, 남은 것은 사랑뿐이었다.
무주 집에 돌아오니, 쨍하게 파란 하늘빛 아래 사방이 흰빛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 동안 두 차례나 산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고 고생한 모양이다. 처마에는 한 팔 길이는 됨직한 고드름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장작을 집어다 아궁이에 불을 땐다. 내 몸에 온기를 더하기 위함이다. 형에 대한 응답으로 그 온기가 쓰여진다면 좋겠다. 그날 밤부터 식구들은 촛불을 당기고 연도를 바치고,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형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 영원한 빛이 그에게 비추기를 바라면서. /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