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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 | [교사일기]
<교사일기>오늘도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전주진북초등학교 교사 박수진 (2004-03-03 19:24:23)
사람에게 '첫'추억은 참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새집으로 이사한 첫날, 원하던 직장의 입사 첫날, 미지로의 여행 첫날, 새 학년을 앞두고 새 교과서를 손에 받아든 첫날,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복을 맞춰 입은 첫날 등... 나에게 지난 한해는 교직생활의 첫 추억이었다. 난 아직도 내 아이들을 만나던 첫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03년 3월 3일. 내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이다. 교무실에서 교무회의를 마치고 내가 받은 반 배정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5-1 담임 박수진' 후관 꼭대기 층 길다란 복도를 지나 맨 끝 교실! 콩닥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올라선 3층. 많은 팻말들을 지나쳐 복도 저편에 '5-1'이라고 쓰인 교실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가 가득 찬 교실들을 지나쳐 5학년 1반 교실 앞에 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교실 가는 길이 왜 그리 길고 멀기만 했던지...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수 차례. 용기를 내어 교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왁자지껄하던 아이들의 소리는 공중으로 흩어졌고, 서른 여섯 명의 똘망똘망한 눈빛이 일제히 교실 앞문에 서 있는 내게로 쏠렸다. 그때의 적막감이란! 너무나 고요해서 교탁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바닥의 삐걱대는 소리가 나를 무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교탁에 도착한 나는 칠판에 또박또박 내 이름 석자를 새기고는 숨죽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간단하게 내 소개를 했다. 나와 내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날 나는 짧은 내 소개와 더불어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그 한가지는 일기를 매일매일 성실하게 써서 아침에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놓아 줄 것과 다른 한가지는 인사를 바르게 하고, 고운 말을 사용하며,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학년의 아이들에게 '일기쓰기'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삐딱한 시선과 억센 말투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예의바른' 행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의 눈에 참으로 즐겁지 않은(?) 일로 비추어 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고민을 하던 끝에 적당한 보상체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기쓰기에 대한 보상은 바로 '눈썹 달린 물고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기를 잘 쓰는 정도에 따라 물고기의 모양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일기 검사를 할 때 물고기를 그려주는데, 가장 잘 쓴 일기에 그려주는 물고기가 바로 눈썹 달린 물고기인 것이다. 내용도 없고 주제도 뚜렷하지 않은 일기에는 살이 없이 앙상한 가시만 남겨진 물고기를 그려주고, 책에서 동시나 짧은 글을 베껴 쓴 일기에는 형태가 불분명한 점선으로 이루어진 물고기를 그려준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일기에는 평범한 물고기를 그려주고, 내용이 좀 더 알차면 평범한 물고기에 예쁜 지느러미가 한 개 더 그려지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솔직한 일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전해지면 물고기의 최고 단계인 눈썹 달린 물고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눈썹 달린 물고기를 열 마리 받게 되면, 선생님과 데이트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처음에는 고학년인 아이들에게 그리 큰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아이들은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잘 쓴 일기'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에서 겪은 일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여 눈썹 달린 물고기를 받은 아이의 허락 하에 그 아이의 일기를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더니, 아이들이 '아∼'하고 작은 탄성을 자아내었다. 좋은 일기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잘 쓴 친구의 일기를 제시하는 것이 효과가 가장 빨랐던 것이다. 이 일을 시발점으로 하여 아이들의 일기쓰기 능력은 놀랄 만큼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날짜를 표현하는 '○월 ○일' 대신에 '내 강낭콩 화분에 싹이 두 개 튼 날'이라는 표현을, 날씨를 표현하는 '흐림' 대신에 '햄스터가 하늘을 뒤덮은 날'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의 무한한 창의력과 상상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음으로 예의바른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마련한 보상체제는 '칭찬릴레이'였다. 이 칭찬릴레이는 우리 반의 한 아이가 함께 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일기장에 의견을 적어 낸 것이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칭찬릴레이는 매일 1교시 시작 전 짧은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며, 어제의 주인공이 열심히 봉사를 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친구를 찾아 오늘의 주인공으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단, 한 번 칭찬릴레이의 주인공으로 선택이 되면 반 아이들의 모두 주인공으로 선택된 후에야 다시 주인공으로 선택될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또한 어제의 주인공이 오늘의 주인공을 찾아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오늘 하루 더 친구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서 내일의 주인공을 선택해야 한다. 이 칭찬릴레이를 하다보면 평소에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가는 아이들을 찾아서 칭찬을 해 줄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친구들의 모습에서 본받을 점을 찾아 스스로가 느끼고 깨우치게 되는 아주 큰 장점이 있다. 칭찬릴레이를 하면서 친구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아이들의 세심한 관찰력에도 놀라지만, 생각지도 못한 선행들-다른 사람의 시들시들한 화분에 영양제 사다 꽂아주기, 학급 연필 통에 꽂아있는 연필 깎아두기, 횡단보도에 서 있는 어린아이 길 건너는 것 도와주기 등-을 교실 안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밖에서까지 하는 아이들의 따스한 마음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하루는 책을 읽으러 학교 근처 도서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선생님!"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여긴 웬일이니?" "저는 책 보러 왔고요, 아무개는 매일 여기서 공부하고요, 누구누구는 저 따라왔어요." 당황함과 반가움에 내뱉은 나의 질문에 그 아이의 대답은 놀라웠다. 방과후에는 당연히 학원을 바쁘게 뛰어 다닐 거라 생각한 나의 예상을 깨고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그 곳에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한다는 아이의 대답이 어찌나 놀랍고도 대견스럽던지... 그랬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도서검색법을 알지 못해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 왔던 것이었다.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에 대해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그 날 만난 아이들에게 도서 검색법도 가르쳐 주고, 맛있는 과자도 사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끔 도서관에 함께 가서 책을 골라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1학기가 끝나가던 무렵의 어느 날, 도서관에 다니는 한 아이가 책 한 권을 내 앞으로 쑤욱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야?" "선생님이요, 저번에 찾으셨던 책이요. 그때는 없었잖아요, 근데 제가 어제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니까 있어서요. 제가 빌려왔어요. 저 이제 검색도 잘 할 수 있어요. 제가 아무개한테도 알려줬어요." 함지박만한 웃음을 입에 걸고 기분 좋게 자랑하는 그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난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아이들과 만나던 첫날, 나는 그 눈망울들의 반짝임 속에서 앞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로 그랬다. 지난 한해동안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로부터 난 많은 것을 배웠다. 순수하게 받아들여 실천하는 태도를 배웠고, 따스한 마음을 함께 나누는 방법을 배웠고,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빌 줄 아는 용기를 배웠고, 넓은 운동장을 맘껏 뛰노는 자유로움을 배웠다. 손자의 일기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검사해 주시고는 마음에 새겨둘 좋은 말씀을 또박또박 적어주시던 할아버지. 딸이 어려워하는 수학문제를 밤늦은 시간까지 해결하시다가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시던 아버지. 손자의 나쁜 손버릇 때문에 하루 하루를 마음 졸이며 고단함으로 보내시는 할머니. 모든 아이들이 내 딸 같다며 이른 아침 횡단보도에서 교통지도를 해 주시던 어머니. 이 모두가 참 소중하고 귀한 내 교직생활의 첫 추억이다. 박수진/1980년 전북장수에서 태어나 전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현재는 진북초등학교에서 자신만의 교육철학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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