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문화저널]
<화가의 산 이야기>길 없는 길을 나선 사람들
글 이상조 화가·산악인(2004-03-03 19:23:12)
겨울은 오고 있는가?
그녀가 오는 소리는 한밤에 듣는 것이 좋다. 아주 은밀하여 조용히 숨 죽여 듣지 않으면 자칫 반가운 소릴 놓치기 십상이다. 깃털만큼 가벼워 나의 마음을 한껏 날아다니게 하고 태산처럼 무거워 짐짓 나의 숨통을 끊기도 한다. 일월이면 한겨울인데도 요즈음은, 그녀 오는 소릴 제대로 들을 수 없어, 해 맞으러 나섰던 참에 아예 그녀를 찾아 나섰다. 화심에서 곰티재 못 미쳐 오른쪽 길을 따라 한참을 지나면 만인에게 덕을 베푼다는 만덕산(761.8m)이 나온다. 이맘때쯤 그녀가 보고플 때마다 '호-' '호-' 시린 손을 불며 두 뺨에 빨갛게 그녀를 확인하고 돌아오곤 하던 곳이다. 만덕산 미륵사 아래, 30 미터쯤 되는 물줄기가, 하얗게 솟은 기둥으로 변해버린 곳이 있다. 모두들 만덕폭포라 부르는 얼음 기둥이다. 다가가기 위해 한참을 하얗게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남기며 오른다. 마주보다 작게 이룬 고드름을 따, 입에 넣고 씹어 본다. '오드득' 고드름이 입안에서 소릴 내고 있다. 그녀의 소리, 깊은 겨울이다.
불확실성의 극복
왜 산을 오르는가? 라는 물음에 답 할 수 있는, 대 자연을 오르는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알피니즘의 역사를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86년 여름에 몽블랑이 초등정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동안 만년설에 뒤덮인 알프스는 얼음덩이를 쏟아 내리거나 눈사태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상하게 하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그 알프스의 여러 고봉들이 몽블랑 초등정 후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차례차례 경쟁적으로 등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등산의 역사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역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산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았는가 하는 예가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쉬르가 몽블랑 등정에 현상금을 건 그 당시, 취리히의 시립병원 의사이자 현대 고생물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일컫는 '요한 야콥쇼히저'라는 저명한 과학자로 알려진 사람조차도, 알프스 산 속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아주 위험한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순수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이란 단어가 탄생한 '알프스 등산의 황금기'라 불리는 1859년에서 1865년 사이인 12년 동안에만도 149개의 알프스 고봉이 초등정 되었다하니 인간의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엄청난 노력에 실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이랴 '알프스 등산의 황금기'를 마감하는 전환점인 1865년, 알프스 4000미터 봉우리 중 최대 난봉이던 마터호른이 등정된 후, 알피니즘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그동안의 등산이 오직 '정상 등정'만이 목적으로 비교적 등산하기 수월한 산등성이를 따라 정상에 오르는 산행이었다면, 1881년 샤모니 침봉 중에 가장 어렵다는 봉우리인 에귀 드 크레뽕(Aiguille de Grepon. 3489m)을 초등한 영국의 머메리(Albert Fredrick Mummery)는 머메리즘(Mummerism)이라는 새로운 등반 사조를 탄생시킨다.
머메리는 산에서 한계를 극복하는 순수 등반을 중시했다. 당시 많은 등산가들이 등정주의(Peak Hunting)의 등반에 급급할 때 그는 '더 험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를 통해서 정상에 올랐다. 그가 제창한 이 새로운 등반 사조는 등산을 '능선을 통해서 오르는 방식에서 벽을 통해 오르는 방식'으로 하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벽 등반 시대의 개막을 예고한다. 이러한 그의 등산 정신은 알피니즘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암. 빙벽등반의 행동규범으로 남아 있다. 그는 1895년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5m. 히말라야산맥 서쪽의 펀잡 히말라야에 위치하며 국가로는 파키스탄의 동북부에 있다. 낭가파르밧은 산스크리스트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며 '산중의 제왕'이라고도 불린다)을 등반하다 실종되어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는 인류가 신(神)들의 영역이라 부르는 8000m 이상의 봉우리에 도전한 최초의 기록이며 또한 히말라야 등반사에 남긴 최초의 조난기록이다. 낭가파르밧은 그 후 37년이 지난 1932년에야 재도전이 시작되고 58년이 지난 1953년에 초등정 되었으니 머메리의 정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고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년 여름 필자가 대장으로 참가한 '한국 마운틴하드웨어 탈레이사가르 원정대'의 발대식에서 어느 원로 산악인의 격려사를 아주 감명 깊게 들은 기억이 있다. (탈레이사가르 6904m 는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봉우리중 하나로 꼽히는, 높지 않지만 더 어려운Loss lofty but hiphly difficult등반을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의 등반 대상지이다) "등산은 높이(Altitude)가 아닌 태도(Attitude)다"라는 말씀이었는데, 이 말을 풀이하면 8000m 이상의 봉우리 14좌가 모두 등정되고 그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도 세계적으로 11명(그중 3명이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 박영석, 한왕룡이다)이 탄생한 오늘날, 등산이 고도를 지향하고 추구함을 본질로 하지만 이제, 자연적 고도에서 정신적 고도로 그 방향을 전환하라는 말이었으니 돌이켜보면 머메리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등산이라는 대 자연을 오르는 행위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가장 근접한 답은 '불확실한 것을 극복하려는 인간 삶의 태도-자유(freedom)정신'이라고 전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모두 오른 엄홍길은 16년 동안의 기나긴 도전에서 14번의 실패 속에서도 그의 목표를 완성했다. 그가 동상에 걸려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고, 실제로 재기 불가능하다는 큰 부상도 딛고 서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친형제 같던 4명의 동료와 4명의 셀파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면서도 목표를 완성한 것은, 그의 공명심이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또다시 머메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엄홍길이 목표를 끝낸 후 저술한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언급한 아래의 글은 많은 고통 속에서도 그가 왜 목표를 향하여 계속 탱크처럼 돌진하였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문명세계를 벗어나서 이 길로 접어들 때마다 나는 내 몸 안의 모든 기공들이 한꺼번에 열리면서 움츠러들었던 세포조직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대자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히말라야에서 문명세계와 닿아 있는 길들은 대부분 베이스캠프 언저리에서 끊겼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 끝에 다다를 때마다 모든 것은 막막했고, 흰 산들은 언제나 그 막막함을 대신했다. 흰 산들을 보고 있으면 때론 죽음에 대한 공포가 꿈속까지 덮쳐왔다. 하지만 그 흰 산을 향해서 나는 끊임없이 길 없는 길을 나섰다"
확실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는 현대인들의 나약함 속에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자유의지는 분명 인간정신의 진화와 몰락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오르기 힘들다고 높이를 줄이겠는가?'라고 조용히 말씀하시고 돌아서 가시던 그 원로산악인의 모습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