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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 | [문화저널]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 사투리>
김규남(2004-03-03 19:21:41)
"엿장시 똥꼬녁은 찐덕찐덕...." 근자에 출간된 윤흥길의 『소라단 가는 길』은 지금의 익산시 당시 이리에서 보낸 작가의 유년기가 당시의 익산말로 되살아나고 있다.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이리에 살았던 필자에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매우 특별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해제에 명쾌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처럼, 방언은 과거를 불어내는 주술의 언어이다. 그리고 작가가 불러낸 농고 방죽이나 소라단의 옛 이야기들은 나의 과거를 불러내는 데도 동일한 효험을 발휘하여 나는 한 동안 내 유년의 기억들 속에서 유영하며, 삼사십년 전의 명선이와 점동이를 만나는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여엇장시 똥꼬녁은 찐더억 찐덕, 과자장시 똥꼬녁은 바사아악 바삭, 지름장시 똥꼬녁은 맨지일 맨질, 자앙원이 똥꼬녁은 질처억 질척......." 그랬다. 누가 누구를 약 올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고 조막동이들은 조막만한 손을 입에 대고 누구를 향해 악질적인 합창을 해댔다. 그것이 '얼매나 꼬솝든지' 아무 생각도 없이 목에 핏대 세워 악을 썼다. 이 악지거리는 반복되는 횟수만큼 패거리들의 응집력을 강화시켰으며, 상대적으로 당하는 아이에게는 무자비한 돌팔매가 되어 그 아이의 온 마음을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급기야 그 아이는 '숭불퉁 앓는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리고, 그제야 이 집단 구타는 몸 사리듯 수그러들곤 하였다. 서릿발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 선 추위가 여전히 맹렬한 엄동의 아침에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꺼적문, 싸립문, 양철 대문, 소슬 대문' 불문하고 '점동아 노올자, 명선아 노올자'를 외치고 다녔고 그 때마다 손등에 '쇠때 찐' 녀석들이 하염없이 흐르는 콧물을 '외약팔'을 들어 팔꿈치에서 손등까지 한번 쓰윽 닦아내고 다시 마무리로 손등 쪽에서 팔꿈치 쪽으로 밀어내며 그 덕에 반질거리는 소매 등의 빛나는 코딱지 계급장을 흔들며 소집 명령에 곧바로 순응하곤 하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놀이들, 계절마다 기분 따라 선택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던 그 많은 놀이들, 우리 동네에서는 어떻든 시한 내내, '스케뜨, 칼스케뜨' 타기가 오전 수강과목이고 연날리기, 자치기, '뺑이치기', '페딱지치기'가 오후 수업이었다. 우리가 겨우내 눈밭, 얼음판을 지치도록 뛰어다닐 때, 한번도 우리와 어울리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 대호. 그 아이는 식전부터 물지게를 지고 '시암'에 가서 물을 지어 날랐고, '또랑'에 가서 또 물을 지어 날랐다. 그 아이는 그 추운 겨울에도 지게 양쪽에 달린 양철통에 철철 넘치게 물을 지어 나르곤 하였다. 그가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의 양친이 모두 앉은뱅이였으며, 아버지는 상이군인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대호는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양친을 대신해서 물지게를 지어 날랐을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일망정 매우 어른스러워서 들짐승 같은 망나니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대호를 대단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그저 한동네 살면서도 서로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내는 친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대호네 가족들의 고단한 삶이 비극적인 역사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되고 나서 나의 이 무관심을 얼마나 책망했던지. 사실, 그런 비극은 '뻥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들짐승 같은 녀석들에게 '뻥새'가 나타나는 날은 또 한 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아마 나이는 한 사십 가량 되었음직한 '뻥새'는 키가 크고 이마는 훤칠하게 벗어진데다가 얼굴색은 유난히 희었다. 그가 그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상당히 지적인 이미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야위어 깡마른데다가 눈이 아주 크고 움푹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뻥'은 퀭한 눈 때문이고 '새'는 야무진 구석이 전혀 없는 모양새를 비유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뻥새'는 늘 동네 고샅 너머에 있는 '한데칙간' 쪽에서 나타나 아무런 표정도 없이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 때마다 조막동이들은 '뻥새, 뻥새' 하고 표정 없는 그를 불러댔고 애들과 뒤섞여 '도찐개찐'으로 '달음방달음방' 그를 뒤따랐다. 주변머리뿐인 '뻥새'의 머리는 언제나 '더펄더펄'했고 어디서 자빠졌는지 잠방이에는 '지푸락'이 달래달래 붙어 있곤 하였다. 그는 무슨 시험을 준비하다가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고, 육이오 때 전쟁에 나갔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가끔 내 유년을 생각하면서 까닭 모르게 모질었던 지악스런 몸짓들을 떠올린다. 내가 쏘아댔던 악다구니들이 대부분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비롯된 억울한 희생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고 나서 무지몽매했던 유년의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왔다. 비극적인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져있던 수많은 개인의 삶들과 그 억울한 희생들이 토대가 되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작가 윤흥길이 '소라단 가는 길'을 쓴 후에 오래 묵은 빚을 갚은 느낌이 들었던 그 만큼, 우리에게 유년에 사용하던 방언들 속에는,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온 우리의 삶이 비치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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