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신귀백의 영화엿보기>시대를 뚫고 나오는 힘에 실패한 <실미도>
신귀백(2004-03-03 19:16:36)
71년 8월, 한 떼의 젊은이들이 대방동 유한양행 사거리에서 무차별적 총격과 함께 폭사한 '살인의 추억', 이들은 죽어서 무장공비로 불렸고 그리고 삼십 년이 흘렀다. 요즘 주말 저녁의 텔레비전을 띄우는 '노브레인' 아무개 말대로 '북괴도당의 침투'라는 발표는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실미도 사건! 한국현대사가 갖는 집단적 외상 중 갈등에 대한 폭력적 해결과 그 응징의 컨텐츠에 이처럼 군침 도는 영화 소재가 또 있을까? 흥행을 좇는 탁월한 감각의 승부사 강우석은 80억의 제작비와 막강한 배급망의 툴로 대중들을 <실미도>간판 앞에 줄서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서른 명의 청춘이 이름도 없이 스러진 이 영화가 하나도 슬프지 않고 그저 '영화'라는 생각이 들뿐, 뿔갱이 아들 설경구에 대한 애잔한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흔한 말로 웰빙의 시대라는데, 그럴 듯하게 포장된 이 인스턴트 식품은 음미의 여운이 없어 진혼의 가슴은 사라지고, 보여주는 자의 '시선'만 남을 뿐. 이 허전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야기를 잠시 낡은 책으로 돌리자. 80년대 초반 한국일보에 연재되던 황석영의『張吉山』을 아침마다 기다려 본 사람들은 안다. 역사소설이라는 그릇에 담긴, '정의사회'라는 리바이어던에 대한 빈정거림과 야유와 조롱의, 비빔밥을 대머리를 비롯한 그(놈)들만 모른다는 그 통쾌함을. 유인물을 붙이고 달아나는 모습 그리고 관군들을 엿먹이는 장면들이 얼음장 밑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의 힘에 대한 시대의 묘사였다는 것을, 오늘날 머리에 색색의 물을 들인 채 햄버거 물고 다니는 아해들은 모를 것이다. 또한『태백산맥』을 서서 읽던 사람들의 장탄식과 님 웨일즈의『아리랑』이 둔탁하게 머리를 내려치던 그 충격에 비하면, 이 다큐 비스무리한 '지나간 사건'은 시취(屍臭)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를 뚫고 나오는 힘도 화면이 주는 눈의 아름다움도 없이 그냥 드라마로만 진행되는 외강내강의 '실미도 잔혹사'는 가혹하게 말하면 역사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 풀어주기 차원이고 무임승차다.
생각해 보자. 감독의 입장에서 교양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단어 수가 제한적인 폭력의 드라마를 꾸리는 것은 쉽다. 위계의 의무나 의리를 강조하는 사악한 집단의 광기에 대한 개인의 치욕적 복속에 따른 아픔과 답답함을 파퓰러하게 치환시키는 강우석의 감각은 탁월하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팩트'에 대한 그의 '의견'은 없다. 자기가 해냈다는 포즈만 있을 뿐, 어떤 정치성도 시대를 뚫고 나오는 힘도 없어서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처럼 미학 없는 보여주기는 답답하기만 한데, 감독은 신문의 인터뷰에서, 배우는 토크쇼 어디든 전방위로 출연해 촬영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작업이었나를 강조한다. <아타나주아>를 전주(국제 영화제가 벌어지는 도시 맞나?)에서 볼 수 없는 나에게는 이 극장도 저 스크린도 오직 <실미도>만 걸게 하는 권력자의 까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광고주의 눈부라림이 귀찮은 기자들은 이 때늦은 '그것을 알려주마'를 비주얼은 약해도 드라마는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말로 웰메이드(이 뻔뻔한 상품에 바치는 교묘한 수사라니)라고 포장한다. 엑스파일에서처럼 '담배 피는 사람' 역할을 한 중정부장의 캐릭터(눈에 힘만 잔뜩 든 그 평면적 연기) 못지 않게 이미 강우석은 한국영화의 담배 피는 사람인 것이다.
68년 저쪽의 김신조가 내려왔고 이쪽의 684부대가 창설되던 비극의 시점이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서 잘 알았을 것이다. 이런 만화 같은 지옥도가 벌어진 그 해, 시와 서화를 사랑하던 스물 일곱의 해사한 청년이 끝모를 감옥생활을 시작한 해라는 것을 이번에 새로 출간한『신영복의 엽서』라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정통성이 없는 군바리들이 장기적 안목으로 '실미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감정적 목표달성을 위한 파행적 수단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무인들의 무모함이 어디 실미도 건 하나 뿐이랴. 구천을 떠돌 중음신들을 철저히 '타인의 고통'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선은 착잡하지만 농담 한마디 던진다. 이쪽이 만든 이 드라이한 '악행의 고백록'을 놀라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다면 저쪽의 곱슬머리에 시컴한 안경을 쓴 배불뚝이 영화광, 위원장 동무 정도가 아닐까. 허허.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