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문화와사람]
무대에서 희망을 꾸렸고 삶을 배웠다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4-03-03 19:11:27)
연극인 류영규
매서운 칼바람이 연일 맹위를 떨치던 설 연휴.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도 귀찮을 만큼 잔뜩 움츠려지는 날이다.
추운 날은, 그런데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기엔 또 그만인 날이다. 촉수를 곤두세우거나 상대방과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거나 하는 따위의 날카로움이 무뎌지는 날, 추위는 사람의 체온을 더 그립게 한다.
지하 계단을 내려서자 뜨끈한 훈김이 달려든다. 동문거리에 있는 창작소극장. 왠지 연극쟁이를 만나기엔 아주 제격인 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1년 만에 연출 나들이에 나선 연극인 류영규(53)씨. 고 박동화 선생의 25주기 추모작 <나루터>의 연출을 맡아 설 연휴 기간에도 극장을 드나들고 있었다.
'2003 전북 연극상 대상 수상, 그리고 박동화 연극상 부활 움직임이 일면서 연극인 류영규씨에 대한 관심이 새삼 집중되고 있다. 새삼, 이라고 굳이 첨언하는 이유는 연극판에 발을 들여놓은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웬일인지 문화계가 그를 조명하는 데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직업 연극인은 아니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지역 연극판을 지켜온 든든한 선배이자 연극계의 증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지난해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작 <상봉>에서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인봉역을 맡아 열연하며 전북연극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고 박동화 선생의 연극혼을 오늘에 되살리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연극을 삶의 첫 페이지로 장식해 온 연극인 류영규씨. 연극 인생은 한국전쟁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가 1957년 정도니까 다섯 살부터 무대에 올랐어요. 소위 반공 연극이었는데, 아역부터 시작을 한 셈이죠. 지금은 이래도 그때는 예쁘장했답니다. 하하.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한 건 그때 당시 서울드라마센터 예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예요. 지금은 서울 예술대죠. 부모님께는 의대에 합격했다고 거짓말하고 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 2학기 때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학비를 보내주지 않으시더군요. 아이스케키 장사도 하고 친구인 이윤택이네 하숙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고학으로 학교를 마쳤습니다."
엉뚱하기로 치면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딴따라'라는 부모님의 격한 반대 속에서도 잡초처럼 연극을 놓지 않았던 그 열정 역시 따를 자 없어 보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주 MBC에서 성우 생활을 했다. 그 당시는 라디오 드라마가 성행했던 때라 성우들의 활약이 컸던 시절이었는데, 1년 남짓 성우생활을 마치고 곧장 농업기술원에 취직했다. 그렇게 생활에 묻혀 연극을 놓을 법도 하련만, 그는 지금까지도 연극판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는 못 먹고 살던 시절이잖아요. 녹색혁명이다 뭐다 해서 날 새는 날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일하고 연극 연습하고 그랬어요. 올해까지 30년을 그렇게 살아온 셈이예요."
아무래도 그가 연극에 대한 깊이를 더하고 무대에 대한 열정을 키웠던 것은 고 박동화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만나는 내내 그는 박동화 선생 이야기를 습관처럼 꺼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역시 박동화 작·연출의 <산천초목>이다.
"그때 출연 배우가 20명이 넘었어요. 재미있었죠. 선후배 배우들과 어울려 연기하면서 연기하는 맛도 더 깊어졌고 박동화 선생님께도 많이 배웠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박동화 선생님께 주눅이 좀 들어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어른이 있어서 극회를 지켜온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큰 보람이기도 하고요."
전북지역 연극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그는 개인적으로나 지역 연극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대학 졸업 직후 박동화 선생과의 만남, 1961년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를 주축으로 한 지역 최초의 기성극단 '창작극회'의 설립, 1980년대 창작극회 대표와 연극협회 전북지부 지회장 겸직, 그리고 1997년 전북연극협회 회장. 뒤돌아보면 1997년 전북연극협회 회장을 맡던 때가 고달팠지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월간 '전북 연극'지를 다달이 펴냈고, 청소년연극제도 그때 만든 겁니다. 교육감 쫓아다니며 많이 싸웠어요. 고등학교부터 연극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죠. 서울을 비롯해서 각 대학들이 연극영화과를 설립하고 있는데, 경험이나 접할 기회가 없어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중국 강소성과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문화 교류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예요."
예산이 없어 사재를 터는 일도 허다했다. 가난한 연극판에서 일을 도모하자니, 좌절하고 희생했던 날들이 어찌 없었을 것인가. 일이 잘 못 꼬여 그나마 월급쟁이로 살며 어렵사리 장만한 아파트를 팔아야 했고, 지금까지도 월급을 압류 당하고 있다. "이런 이야긴 쓰지 마세요" 하는데, 긴 담배연기가 한숨을 달고 흩어진다.
연극 인연으로 그렇게 모진 시간을 견뎌왔으면서도 그는 "연극을 하는 순간 모든 걸 잊게 되니까…"라고 말한다. 연극은 좌절과 희생을 몰고 오는 '재앙'이고, 또 그것을 물리치는 '힘'이다. 그래서 연극은 그에게 천형이다.
슬픔과 외로움도 연극으로부터 얻은 것들이다. 1976년부터 84년까지 2년 간격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다섯명의 선배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나더란다. 사람을 좋아해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정 때문에도 연극판을 떠나지 못한 그에게 그것은 큰 상실감이었다.
"권기웅 박동화 박길추 이기수 이현수 선배가 줄줄이 2년 간격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면서 외로움도 깊어지더라고요. 그런데 90년대 초반쯤인가 박동화 선생님이 계속 꿈에 나타나더군요. 여러 가지로 고심하고 연구한 끝에 박동화 연극상을 제정하고, 지금 체련공원에 동상도 세웠습니다. 그 이후론 안 보이시더라구요. 신기한 일이죠."
녹록치 않은 연극 인생 30년. 지금까지 총 다섯편의 연출을 맡았고, 40여편의 작품에 출연해 연기를 했다. 어떤 연기가 가장 자신 있는지, 연기와 연출 중 어느 게 더 어려운 지 물었다.
"저는 맛이 좀 간 역할, 나사가 약간 풀린 사람 역할을 잘 하는 편이죠. 하하... 예전엔 정신병원도 많이 다녔어요. 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배우러 다닌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연출이 더 어렵죠. 연출은 기획에서부터 배우들 건강상태까지 체크해 가면서 큰 그림부터 세세한 상황들을 다 조정해야 하니까요. 오랜만에 <나루터> 연출을 맡았는데, 후배들이 잘 따라줘서 너무 고마워요."
연극 애호가라면 임실 출신 의병 이석용을 조명한 창작극 <선비 그리고 칼>에서 익살스럽고 코믹한 의병으로 출연했던 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조연과 단역이라도 그는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한 마디라도 좋아요. 주인공 욕심요? 그거야 후배들이 해야죠. 홍석찬 류경호 조민철 전춘근 오진욱 등등 든든한 후배들이 있어서 아주 다행입니다."
그래도 연극계 대 선배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그는 고맙다. 박동화 선생을 기리기 위한 연극 페스티벌이나 창작소극장 이전 등 가슴에 간직한 소망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1년에 한편만이라도 박동화 선생님 이름을 걸고 연극 페스티벌을 이어가고 싶어요. 소박하게라도 노력해 갈 겁니다. 그리고 소극장 이전은 스폰서도 알아보고 독지가도 물색 중인데 쉽지 않네요. 로또나 당첨돼야 가능할지... 하하"
배우들이 하나 둘 극장으로 모여든다. 오늘 공연의 리허설을 위해서다. 소품 만드는 일에 정신을 빼앗겨 어느새 인터뷰는 뒷전이다.
"인생이 연극이죠, 뭐... 잘 되는 때 있으면 안 되는 때도 있고. 거지도 해보고 대통령도 해보고 재벌도 해보고. 얼마나 매력 있습니까? 후회는 없어요. 그나저나 언제 동문거리에서 막걸리나 한잔합시다"
초로의 연극쟁이에게서 열정과 에너지를 느끼는 일은 사뭇 색다른 감동이다. 또 삶의 뜨거움과 여유가 있어 언제라도 반갑다. 삶에 지쳐있다면 무대 위에 선 연극인 류영규, 그의 열정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