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8 | [정철성의 책꽂이]
엄살을 경계하며
정철성(2003-04-07 10:46:01)
복효근이 대상을 관찰하는 눈은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범한 물상들이 그의 시를 통하여 관심의 초점 영역에 들어온다. 작년에 그의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을 받아 읽으면서 동식물의 이름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제 다시 읽으면서 어떤 것들이 나오는지 확인해 보니 마음의 흐름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은 이런 목록이 만들어졌다.
함박꽃, 벚나무, 오동, 석류, 나팔꽃, 단감, 왕버드나무, 측백나무, 불두화, 철쭉, 매화, 토란, 소나무, 탱자나무, 밤꽃, 조팝꽃, 감꽃
빙어, 탁목조, 염소, 아귀, 광어, 딱정벌레, 달팽이, 오징어
작가회의의 월례문학토론회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효근이 이번 시집이 좋데 그려." 그게 누구였는지 그게 중요할까? {새에 대한 반성문}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시인의 자신감이 배어 있다. 나는 복효근의 시집에서 음양의 조화를 강조하는 조선민화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딱정벌레가 되고 싶었을 때]를 읽노라면 들큰한 색정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함박꽃 화심花心 속에서
딱정벌레 두 마리 얽혀 흘레하고 있다
내가 저 벌레 두 마리로
함박꽃 속에서 저럴 수 있다면
꽃송이째 꺾여 불 속에 던져진대도
그 다음은 기약 없어도 좋겠네
그런데 시인은 동반자도 없이 홀로 흐드러진 함박꽃 속을 들여다보며 몽상에 잠긴다. 이런 상태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관음증을 잠시 만족시킬 추문에 도달할 수 없다. [만전춘]과 비교하자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할까?
그런가 하면 삶의 모습이 풍속화에 담긴 시들도 있다. 그중 눈에 뜨이는 시를 한편 소개한다. 제목은 [등신불]이다. 사람을 칭송함에 있어 이렇게 지긋하게 노래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중앙성당 앞 길가에
졸고 있다
다 팔아도 2만원 어치가 안 될 푸성귀를
늘어놓은 할머니 한 분
양버즘나무가 제 그림자를 끌어당겨 덮어주려 하지만
8월 오후 세시의 햇볕이
속살까지 구워내는 등신불상 하나
--한 찰나라도 먼저 56억년 저쪽에 이르기 위해
자동차들이 질주해 가는 동안
이미 용화세상에 들었을까
가끔 꿈결에 깨어
경전을 넘기듯 무심히 몇 가닥씩 다듬어 놓는
상추경經 우엉경經 열무경經 부추경經 쪽파경經……
이 지옥이 저로 하여 눈부시다
잎이 넓고 줄기의 껍질이 터지면서 벗겨지는 양버즘나무는 가로수로 많이 심는 플라타너스와 같은 나무이다. 햇볕에 익어 검게 그을린 할머니는 잘 구워진 소조불상처럼 보인다. 56억 7천만년 후 미륵이 용화나무 아래에서 세 번 설법하게 된다는데 이미 부처가 있고 나무가 있으니 그때가 지금이다. 설법은 천수경, 법구경, 화엄경, 아미타경, 금강경 대신 상추, 우엉, 열무, 부추, 쪽파로 갖추어 놓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동차의 질주를 힐난하는 시인의 어투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싶을 만큼 냉소적이다. 다시 보니 성당이나 양버즘나무에서 외래문화에 대한 부지불식간의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을 과민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미륵이 있는 지옥은 이미 지옥을 면하였고 그래서 눈부시다.
복효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의 눈을 열어둔다. 몰입한다고 보이는 순간에도 거리는 항상 완연하다. 이러한 태도는 새에 대한 그의 치밀한 관찰에서 잘 드러난다. [새에 대한 반성문]에서 그는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새 발자국 화석]에 그려진 "잠시 혹은 오래/ 그 진흙밭에 머물고자했던 욕망의 무게"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매번 시인은 새를 멀리 띄워 놓고 좁혀지지 않는 이 공간의 틈에 여유와 엄살과 익살을 섞어 넣는다. 새들을 보아버린 죄값으로 시인은 자신의 호사스런 관절통과 천박한 그리움과 "욕망의 사이즈와 무게"를 반성하는 것이다.
[소리 세례]와 [비누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나타난다. 나는 복효근의 통찰이 치밀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무게를 함께 간직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짧지만 아름다운 시 [일생은]의 마지막 줄에서 만족과 불만이 꼬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시작된다.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의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