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문화시평]
배가된 감동, 희미해진 서사
글 곽병창 연출가(2004-03-03 19:07:06)
뮤지컬 <블루사이공>
1. 뮤지컬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극적 짜임으로 빚어낸 음악에 있다. 이는 우선 단편적인 하나하나의 노래들이 담을 수 없는 복잡하고 깊은 우여곡절들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랑과 이별을 다룬 노래라 할지라도 그 노랫말 속 주인공들의 삶이 더 총체적으로 감지되는 노래를 들려주고 듣게 되므로, 맥락 없이 토로하는 사랑의 감정들과는 그 울림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뮤지컬은 스토리에 집착해야 하는 오래된 드라마의 형식에 비해서 훨씬 편안한 볼거리, 들을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연극의 여러 형식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장르이다. 뮤지컬은 정극과 달리 간간이 줄거리의 흐름을 멈추고 편안하게 쉬어 갈 수 있게 배치한 노래들을 통해, 이른바 낭만적 과장(romantic exaggeration)을 시도한다. 이 과장된 음악과 춤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잊고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풍성한 여흥거리에 잠길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에서의 음악은 가장 막강한 무기가 되는 동시에 관객의 의식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망각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분명 양날의 칼인 셈이다.
2. 한층 새롭게 단장한 뮤지컬 [블루사이공]은 그런 점에서 음악의 기능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 거리를 남긴 작품이었다. 우선 초연 공연에 비해서 월등히 강화된 음악적 장치들 덕분에 몇몇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감정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프로그램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초연에 비해서 훨씬 두터워진 합창 부분의 효과가 매우 크게 다가왔다. 또한 다양한 음악들의 배치를 통해 시대적 상황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음악 자체의 연극적 우여곡절을 충분히 드러내는 방식이 긴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배역에 따라 분명한 주제선율을 설정하고 이를 다양하게 변주해내는 방식이나 오케스트라 편성을 통한 반주음악의 스케일 확대, 현장 공연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낸 배우들의 음악적 기량 등이 작품의 다양한 미감을 잘 표출하고 있다. 분명 창작뮤지컬의 한계를 점점 극복해 가는 선도적 작품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30여 곡에 달하는 뮤지컬 넘버 가운데에서 공연 뒤에 관객의 뇌리에 잔영으로 남아 계속적으로 울림을 주는 노래가 한두 곡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풍성하고 다양한 음악적 보강을 가했음에도 [캐츠]의 '메모리'처럼 선명한 인상의 선율을 하나 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과욕 탓일까? 작곡자의 메모대로라면 몇 개의 주제가 다양하게 변주(variation)되면서 쓰인 셈인데, 그 방식이 오히려 하나의 주선율을 부각시키는 데에 장애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모든 노래들이 대단히 공들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반면, 지속적인 復唱(reprise)을 통한 극적 감동의 점진적이고 단단한 상승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대신에 군가와 대중가요를 포함한 거의 전곡에 새로운 악기편성을 통해 참신한 맛을 살리고, 합창(chorus), 교환창 등의 기법을 총동원한 작곡자의 열정과 연기진의 노고에 힘입어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 작품의 호흡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특히 커튼콜 직전의 마지막 합창 장면은, 산자와 죽은 자를 포함한 전 등장인물들의 시공을 넘나드는 재회를 통해 개인의 의지로 피해 갈 수 없었던 일그러진 역사에 대한 회한을 쏟아내면서 객석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분의 감동을 받치고 있는 음악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이다. 이 노래는 김추자 버전의 얄팍한 맛 대신에 전혀 다른 무게로 재창조한 소울풍의 창법으로 작품 전체의 무게를 더하는 데 충분히 제 노릇을 다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품 전체의 주제가가 될 수는 없어 보인다. 또 시종 가수를 통해 들려 주고 있는 "블루-사이공"의 반복적 선율도 어딘지 허전한 느낌을 남긴다. 이 두 곡의 허전한 자리를 대신 메워 줄 진정한 주제가(production number)가 아쉽다.
3. 아직 아쉬운 측면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보강한 음악들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눈과 귀를 집중하게 하고 작가의 의도대로 역사 속으로의 아픈 시간여행을 돕는 구실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음악적 장식의 대폭적 보강과 이를 통한 감동의 배가와 함께, 일차 공연에서와 달라진 점으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서사(narrative)의 축소이다. 줄거리는 뮤지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이른바 성공한 뮤지컬들의 서사구조는 정극 못지않게 탄탄하다. 외래뮤지컬의 단순 수입과정에서 빚어진 내러티브 경시 풍조나, 초창기 창작뮤지컬들에서 보인 음악과잉 경향은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제대로 된 창작뮤지컬을 줄기차게 만들어온 [모시는 사람들]이 선보인 일련의 작업들은 이른바 줄거리와 주제가 선명한 뮤지컬을 그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런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는 이번 공연에서의 서사적 흐름에 주목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한국적 뮤지컬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극단 차원의 생각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이다. 우선 이번 공연에서 작품 전체의 전면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김문석과 후엔의 로맨스이다. 초연에서 상대적으로 강조했던 2세들의 이야기를 대폭 축소한 것이다. 공연 전에 객석을 돌며 처연한 모습으로 헤어진 아버지 김문석을 찾던 북청은 결국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배 다른 동생 신창을 만나게 된다. 초연에서 불법 취업한 외국인노동자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인질극을 벌이며 아버지를 찾던 북청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후엔의 몸에서 나은 북청과 귀국 뒤에 결혼해서 낳은 신창의 이야기는 어느 사이엔가 뒷면으로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풍성해진 음악들이 차지한 셈이다. 북청과 신창의 이야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 작품이 월남전과 그 이후의 후유증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전쟁의 와중에 만난 두 남녀의 쓰라린 로맨스로 은연중에 그 관심의 초점을 옮겨 갔음을 의미한다. 이를 좀 더 연장해서 말하자면 김문석을 둘러싸고 있는 현대사의 질긴 모순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던 태도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며,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이름에 좀 더 헌신하기 위해서 잘 짜여진 서사구조를 통한 연극적 각성을 잠시 유보하는 듯한 태도이다. 좀 거칠게 분류하자면,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동을, 서사는 각성을 책임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4. '음악적 풍성함을 통한 감동의 배가, 서사의 축소로 인한 각성 효과의 축소', 이번 공연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이렇다. 명백히 뮤지컬이라는 이름에 대한 가위눌림의 결과인 듯 보이는 몇 곡의 노래들('우편상병의 노래', '편지' 등)에서, 서사의 진행이나 극적 고양과도 무관한 듯한 노랫말과, 우리말의 강약을 무시한 채 붙여진 선율들이 이를 반증한다. 예를 들어 '우편상병의 노래'는 이른바 showstopper의 역할을 위해 동원한 노래이지만 정작 그 뒤의 익살스런 연기 장면이 아니라면 밋밋한 장면설명에 지나지 않으며, '편지' 같은 곡은 노래 자체로의 음악성은 뛰어나지만, 장면 전개상 필연성이 떨어져서 생경한 느낌을 준다. 노래를 부르는 데 공을 들이는 대신, 잔잔한 배경음악을 곁들인 낭송으로 처리했더라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 등을 더욱 절박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시는 곳 월나아-암 땅 맹호부대 용사들아'를 외치는 교복 입은 소녀들, 찬합을 두드리며 노는 졸병들의 군가, 화장품을 받아들고 푸짐하게 한 판 노는 동네 아줌마들의 익숙한 익살 등이 주는 감동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음악적으로 보면 그 익숙한 선율들의 연장선에서 막판 '김상사 주제곡'의 감동도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게 숙제다. 익숙한 선율들의 그 촌스럽지만 진한 감동과 새로 만든 뮤지컬-적 노래들 사이의 거리, 그만큼이 결국 서사와 음악 사이의 거리와 함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고자 하는 창작 뮤지컬이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깃발만 보아도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저 준비된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