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저널초점]
개혁의 씨앗은 뿌려졌다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4-03-03 19:05:47)
개혁의 씨앗은 뿌려졌다
사무국장 교체로 새 국면 맞은 지역 문화원
척박한 문화환경 속에서도 문화 향수의 갈증을 풀어주며 지역문화 발전을 위한 유일한 창구 역할을 담당해왔던 문화원이 지난해 '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한바탕 진통을 겪었다.
1960년대 '문화'를 논하기에도 벅찬 시절, 문화원은 향토사 정리와 지역민의 문화 욕구를 풀어내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맡으며 문화의 전진기지로 서왔다. 그러다 1994년 '지방문화원 진흥법'에 따라 국가 정액보조단체로 법적 지위를 얻으면서 '온실 속 화초'로 든든한 정부 지원을 받는 동안 조직의 구태와 파행운영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지난해 초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지방 문화원이 개혁 대상으로 본격 거론되면서 그동안 여론의 표적이 되어왔던 지방 문화원이 다시 한번 들썩거렸다. 정부가 문화원 개혁 카드로 내놓은 것은 '사무국장 교체'.
이 같은 정부 개혁안이 발표되면서 기존 사무국장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사회적으로 큰 반향이나 공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열악한 근무 여건과 박봉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문화원의 중추 인력으로 일했던 사무국장을 부패의 온상으로 싸잡아 비판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지만, 이들의 항변이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했던 것은 문화원 개혁의 필요성에 여론의 무게가 쏠려 있었기 때문. 사무국장 교체가 문화원 개혁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여론도 폭넓게 조성됐다.
정부는 개혁안을 따르지 않는 시군에 향후 5년간 국고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혀 정부 스스로 개혁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고, 전북 지역 역시 지난 4월~6월 사이 전주문화원을 비롯해 완주, 진안, 무주, 고창, 부안 문화원이 사무국장을 교체하고 이 같은 개혁 흐름에 동참했다.
그러나 일부 문화원의 경우 '공개 채용' 형식의 개혁안을 수용했지만, 기존 사무국장을 그대로 다시 채용하는 식의 '방어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문화원의 운영 실태와 내부 사정을 일률적으로 재단해 '사무국장' 교체라는 획일적 방안을 내놓은 것도 개혁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지만, 문화원 자체의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개혁 의지가 아쉽다는 지적이 높았다.
사무국장 교체, 국면 전환의 호기
내부의 자정 노력보다는 정부의 권고에 의해 개혁의 물꼬를 트긴 했지만, 지방 문화원의 변모된 모습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중요한 고비임에는 틀림없다. 문화원의 실무를 짊어진 중추 인력이라 할 사무국장을 교체함으로써 노쇠한 인력과 전문성 부족을 개선하고, 젊은 감각을 끌어와 문화원의 미래를 그리는 국면 전환의 호기이기 때문이다.
공개 채용으로 선발된 사무국장은 대부분 지난해 7월부터 업무를 시작, 올 1월로 7개월의 개혁일지를 채웠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연령층을 이루고 있는 젊은 사무국장들이 적응기는 충분히 거친 셈이다.
'젊은 피 수혈'로 변화에 대한 기대가 한껏 쏠려 있긴 하지만, 가시적이고 고무적인 결과를 셈하기엔 아직 이르다. "적응기와 과도기이기 때문에 아직은 힘을 실어줄 때"라는 기대론이 높지만, 교체 사무국장의 진취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다. 물론 사무국장들의 '이유 있는' 항변이 없지 않지만, 이는 오히려 개혁과 변화를 위해 문화원 구성원들에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사무국장들의 이유 있는 항변 하나, 자생력이 부족해 일거에 조직과 사업의 혁신을 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주장. 자생력 부재는 지방 문화원이 오랫동안 국가 예산을 지원 받으며 안정적인 운영을 해오는 동안 스스로 재정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회원들의 자율적 참여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새로운 사무국장들은 "이사들의 적극적 참여와 관심이 부족한데다 체계적인 회원 관리 등이 소홀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문화원이 1960년대부터 4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대부분의 조직이 노쇠한 지역 토착세력이나 보수적인 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굳어지면서 내부 알력싸움으로 물의를 빚거나 구태의연한 사업 전개로 지역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온 것이 사실. 교체 사무국장들이 가장 큰 부담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혁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실제로 새 사무국장들은 "어찌됐든 오랫동안 문화원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힘써온 '어른'들의 기득권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을 건의하거나 조직 활성화 등을 위한 개혁 방안을 제안하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놓고 있다. 여기에 실제 사업에 관여하고 관심을 가져온 한 두명 '실세'들의 영향력이 워낙 큰데다, 상대적으로 참여가 저조한 이사들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 묻혀 있어, 의사소통 구조의 난맥상이 사무국장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장애라고 털어놓고 있다.
이종진 전주 문화원 사무국장은 "문화원이 오랫동안 안정된 정부 지원을 받아왔다는 점이나 토착세력과 가까이 있어 전형적인 관변단체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사업 개발에 게을렀다는 점이나 문화원 조직이 활기를 잃게 된 것은 전문성 부족보다는 오히려 정부 지원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나 조직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를 활기 있게 끌어가지 못한 수동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과 운영실태 천차만별…조직원 사명감이 중요 덕목
개혁을 위한 최적의 여건이면서 동시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조직 내부에 이사와 감사를 두고 자체 인사권과 예산 편성 및 집행권을 지닌 완결된 조직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국장 교체'도 5년간 국고 보조를 중단하겠다는 정부의 엄포가 있긴 했지만, 지방 문화원이 가진 재정 능력과 운영실태는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자생력 있는 문화원일수록 중앙 정부가 일률적으로 통제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고유 영역이 더 넓고 견고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때문에 문화원 자체의 자정 노력이나 지역 문화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조직원들의 사명감이 더욱더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다. 사무국장 교체로 전문성과 투명성이 강화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높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지역 문화의 활력이나 지역 내에서 문화원이 가진 위상 또한 문화원의 역할과 기능을 가늠하고 변화의 여지를 찾아가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지역 내 문화원 위상 다지기가 새 사무국장들의 중요한 임무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전북지역 내 지역 문화의 활력이 크고 문화 인프라가 높은 전주의 경우 전주문화원이 문화적 기반이 취약한 타 시군 문화원보다 그 위상 면에서 오히려 취약해 사업과 조직의 활기를 되찾고 지방정부나 주민들로부터 인지도를 높여가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원 지원 예산이 국비 50%, 자치단체 50%로 구성되는데, 자치단체의 경우 지원금액의 '의무 기준'을 초과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 지역 문화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문화원의 참여가 저조한 것도 문화원이 지닌 전문성이나 역량에 지방정부나 지역 주민들이 큰 신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정액 지원 안에서 몇 십년동안 변하지 않는 정례 사업 운영만으로는 급변하는 문화 환경에서 신뢰와 위상을 얻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주문화원의 경우 다섯명의 원장이 교체됐고, 이사들 역시 40대는 전무한 상황에 50대 한 두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60~70대로 구성돼 있다. 변화된 문화환경에 적응하고 문화원의 미래 역할을 찾아가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군 단위 문화원과 같이 도시 규모가 작은 곳일수록 자치단체의 문화예술 업무를 맡기거나 이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문화원이 누려온 오래된 기득권 덕이기도 하지만, 문화원의 전문성과 노하우가 지역 문화를 꾸려가는 데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시민 문화단체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변화된 문화지형 속에서 문화원이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이나 안정된 지위에 안주한다면, 지역 문화를 견인하는 선진적 단체로서의 변모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문화원 스스로 적극적으로 일을 만들어 가고 그 역량을 인정받은 곳도 적지 않다. 남원 문화원의 경우 사무국장의 적극적인 사업 마인드와 향토사 연구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는 모범사례로 꼽힌다. 전남 진도와 해남 문화원 역시 활기가 있는 건실한 문화원으로 이름이 높다. 이들 모범 사례로 꼽히는 문화원의 공통점은 일을 찾아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스스로 활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 문화원의 가장 큰 장점은 각 지역 문화원끼리의 네트워크가 공고하다는 점이다. 40년 넘게 지역 문화와 향토사 관련 자료를 펴내고 모아오면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자료 역시 풍부하다. 이를 체계화해 지역 문화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드는 일은 문화원의 몫이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교체된 사무국장들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화두를 찾아 문화원 안에서 이를 반영하고 갈무리해 나갈 수 있는 효율적인 조직구조를 만들고 새로운 사업 발굴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라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
온실 속에 있던 문화원이 개혁 국면을 맞았다. 급변하는 문화 지형 속에서 미래의 역할 규정에 대한 고민이나 조직의 활력 찾기, 지역 내 위상 다지기 등 만만치 않은 과제가 얹혀져 있다. 젊은 사무국장들의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행보가 문화원을 지역민과 더 가깝게 하는 작은 개혁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되새겨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