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 | [문화칼럼]
복지제도의 그늘
윤찬영/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주대 사회과학부(2004-03-03 18:53:27)
지난 12월 6일,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 3학년인 학생이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6개월을 함께 지냈다는 소식이었다. 언론에서는 중학생이 학교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는 엽기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소식을 듣고서 아마도 이 부분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무관심한 선생님들과 급우들에 대해 질타했다. 이 부분은 오보였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결국 송군은 매우 기이한 청소년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보도태도는 없는 사람들에 대해 언론이 얼마나 경솔하고 선정적인 흥미 위주로 취급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 한 채 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는 듯해 안타깝다. 일단 이 가족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채를 갚느라 살던 집도 처분하고 자신의 당뇨병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건강은 회복불능의 지경에 이르렀고, 보증금 3백만 원에 월 18만 원 하는 12평 짜리 월세방에 살면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선정되어 월 39만여 원의 생계급여와 아버지가 가입했던 국민연금의 유족급여로 월 12만 원을 받아 생활해 왔다. 이 조차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무단전출로 인해 수급자에서 제외되어 월 12만원으로 생활해 왔다. 지난 해 5월부터는 월세를 내지 못해 전기와 가스 공급이 끊기게 되었다. 그 후 6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송군은 어찌 할 바를 몰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려움과 죄의식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며 6개월 간 그냥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던 지난 1999년에서 2000년 무렵부터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던 김만제씨는 이 제도에 대해 퍼주기복지 또는 사회주의식 제도라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월간지 월간J에서는 2000년 7월호에서 경제학자와 이에 동조하는 일부 사회복지학자를 동원하여 기초생활보장급여가 너무 높다는 좌담회 논의 내용을 기사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여기에 동참했던 학자들이 지난 연말에 국민연금 보험료를 인상하고 급여율을 낮춰야 한다는 정부의 연금제도개선안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송군의 처지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거나 반성한다는 글을 아직은 본 적이 없다. 그들의 말대로, 너무 많이 퍼주는 복지이고 너무 많이 주는 연금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속담에 "내 배 부르니 종의 밥 짓지 말라"는 말이 있다. 소위, 전문가, 정치인들의 편협한 계급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력이 밝힌 바에 따르면, 2003년 9월말까지 전기요금 체납 건수가 작년 같은 기간의 건수보다 60.9% 증가한 1,205만 건(6,523억 원)이라 한다. 3개월 이상 전기료를 체납하여 전기가 끊긴 경우도 그 전년도의 같은 기간에 비해 31.7%가 늘어 난 47만 9,015 건이라고 한다. 송군 가족과 같은 경우가 이렇게 많은 것이다. 추운 겨울에 전기와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또 어떤 죽음과 불행이 발생하게 될 지 참으로 걱정이 된다.
송군 가족의 경우를 보면, 교통사고, 질병, 가구주의 사망 등의 사회적 위험이 한 가족을 완전히 파괴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고나 위험들은 개인의 노동능력을 저하시키거나 완전히 상실케 함으로써, 개인과 가족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물질적인 토대마저 무너뜨린다. 이에 대한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가? 국민연금제도가 소득이 중단 또는 상실되었을 때 소득을 보전해주는 제도인가, 건강보험제도가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보장해주는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저소득층이나 빈민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는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송군과 같이 가정의 형편이 어렵고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학생들의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을 돌보아주고 지원해주는 학교사회복지제도는 아예 기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여러 해 전부터 사회복지계에서는 학교사회복지를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교육계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읍·면·동사무소 역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 대한 서류관리 외에 인간다운 생존이나 자립을 위해 서비스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구조나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국가사회사업이나 사회복지사무소와 같은 전달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현실에서 행정청은 관할구역 안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져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또한 송군이 살았던 지역과 같은 농촌지역이나 도농 복합지역 같은 곳에는 사회복지관 같은 민간 서비스 전달체계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지난 1999년 여름, 국민적 응원 속에 도주하다 기어이 잡히고 만 탈주범 신창원의 전설을 기억하는가? 신창원은 부모의 이혼으로 해체된 가난한 농촌가정 출신이었다. 학교에서조차 냉대받고 아버지의 학대 속에 가출 청소년이 된 신창원은 결국 살인죄로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범죄인을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는 교정복지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인권을 외치며 감옥을 탈출하여 오히려 국민들의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족복지, 아동복지, 학교사회복지, 교정복지 등 다양한 복지제도의 누락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90년대 초, 서울 장안을 공포에 떨게 했던 탈주범들을 기억하는가? 그 중 지강헌이라는 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을 남기고 자살하였다. 그 후 가난한 농촌출신 청소년들이 부유층을 상대로 엽기적인 살인범죄를 저질러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지존파 사건, 막가파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런가 하면, 작년에는 장기실업과 카드 빚 등 때문에 생활고를 비관한 사람들이 어린 자녀까지 동반한 자살 사건들이 줄을 이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이에 반하여 송군은 어린 나이에 억압적이고 온기라고는 찾기 어려운 냉엄한 현실 앞에서 침묵으로 모든 것을 견디며, 말을 잊어버렸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친 이후 빈부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두고 볼 것인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다.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제도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일자리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복지제도나 일자리는 희망이다. 희망이 없는 것은 곧 죽음이다. 우리는 죽은 복지제도의 시신과 동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