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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 | [한상봉의 시골살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문화저널(2004-02-19 16:17:29)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잠언시집이 있다. 알아들어서 사는데 교훈이 될만한 동서양의 조상님 가르침을 엮어놓은 것이라 보면 무방할 텐데, 이른바 ‘마음공부파’로 분류되는 류시화 시인이 엮었다는 점에서, 왠지 엄혹한 현실 바깥에 사는 사람들의 어줍잖은 풍류(風流)에 현혹되지 않을까, 해서 항상 책꽂이에서 눈에 뜨이면서도 집어들지 않게 되는 책이었다. 시인은 시인답게 제목을 정했다. ‘뭘 모르던 과거’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고, 이젠 늦게나마 생애의 진수를 건져 올렸다는 만족감의 표현처럼 보였다. 책제목이 된 잠언시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인생에 대해서 덜 고민하고, 덜 초조해하고, 덜 걱정하고,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사랑에 열중하고 춤추고 신뢰하며 감사하고 행복해 하였으리라고 말한다. 때로 저주처럼 느껴지는 현실도 진실을 알고 보면 축복임을 우리가 다만 어리석어서 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단박에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들먹이며 먼저 비판의 날을 세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도를 ‘성자들의 나라’라고 여기며 경제적 가난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높고, 삶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초월적 삶에 관하여 신비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한편 이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려는 사람은 그 감상적 신비주의의 뒤에 새겨진 그림자, 곧 비참한 민중의 실제적 생활과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논할 것이다. 영성과 삶을 나누어 가지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항상 실재의 한 면만을 보게 한다. 자신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맞는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결국 자기 생각을 스스로 강화하고 남에게 선전할 수 있겠다. 후자를 자꾸 부각시키다보면, 자칫 세상을 자꾸 어둠으로 칙칙하게 채색하고 절망하거나 투쟁적인 삶으로 자기를 내몰 것이다. 이를 두고 만일 비관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전자의 경우엔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낙관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자신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전에 하느님의 모상성을 나누어 가진 존귀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세상이 우리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믿지 않고 호의를 지니고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후자가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한다면, 전자는 인간 스스로를 변혁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 어느 쪽도 온전하게 손을 들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한다는 점이 문제다. 예전에 사회운동을 할 때는 ‘나의 행복’이란 항상 민중의 행복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활동가에게 행복은 ‘사치’였으니까. ‘헌신과 봉사’는 항상 바깥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행복의 대상에 안팎이 따로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차원에선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나는 아마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도 예전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건 인간본질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역사의식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현재의 삶을 장밋빛으로 믿지 못한다. 잠언시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아직도 얻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요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살기 힘들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귀농한 지 꼬박 사 년을 채우고 있는 시점에서, 나 역시 생계의 문제 앞에서 버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 버거움 속에서, 가난 속에서 고민과 걱정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즐기라는 이야기는 말은 고맙지만 아직은 사양하고 싶다. 나는 좀더 어둠 속에서 앉아 있어야 할 모양이다, 사람이 덜 되었으니까. 내 영혼의 원형질이 솟구쳐 환희감에 떨 때까지 현실은 좀더 가혹해 질 것이다. /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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