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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 | [파랑새를 찾아서]
왜, 아이들에게 이솝 우화를 읽히는 걸까?
글 김찬곤 어린이신문 굴렁쇠 대표 (2004-02-19 16:14:14)
‘이솝 우화’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집에 이솝 우화 책 한 권 없는 집이 없지요. 이렇다 보니 초등학생 때면 당연히 이솝 우화는 꼭 읽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굴렁쇠는 창간 때부터 이솝하고 싸웠습니다. 싸워야 할 게 참 많았는데, 굳이 이솝을 크게 놓고 싸운 것은 굴렁쇠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솝은 우리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둘째, 이솝 우화는 우리가 아는 그런 우화가 아니라는 것,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굴렁쇠에서 크게 다루고, 그 문제점을 낱낱이 밝혀 놓아도 부모님 마음은 끄떡없더군요. 나는 서양 사람들이 이솝을 어떻게 보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혹시 보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이솝과 여우가 항아리 같은 의자에 앉아 정답게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그림 말입니다. 또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이솝이 왼손으로 여우를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우화를 받쳐 들고 읽어 주는 그림 말입니다. 나는 이 그림이야말로 이솝을 정확하게 보여 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솝은 한마디로 간사한 사람이라는 거죠. 여우와 얘기를 나눌 정도라면, 그것도 아주 정답게 나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 또한 죄다 여우처럼 간사한 얘기라는 거죠. 제가 알기로, 서양 사람들은 이솝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솝은 무슨 현자도 아니고, 교훈이 가득 들어 있는 우화, 뭐 그런 우화를 지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솝을 무슨 현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러니 우리 아이들이고 부모님들이고 죄다 이렇게 여길 수밖에요. 아무래도 이렇게 된 까닭은 출판사들이 장난을 쳐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책을 내서 팔아먹으려고 이솝을 방방 띄웠다는 거죠. 또 일본 제국주의 영향 탓도 있습니다. 이솝 우화가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뭐 아주 옛날부터 중국을 거쳐, 혹은 서남아시아를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갑자기 한꺼번에 들어온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1890년대입니다. 이 때 우리 나라에도 지금으로 치자면 교육부 같은 ‘학부’가 꾸려집니다. 바로 ‘학부’입니다. 이 학부는 일본 유학파들이 모여 이 나라 교육을 맡아서 한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일본 교과서를 따라 우리 교과서를 낼 수밖에요. 이 때 나온 교과서가 있는데, 바로 《신정 심상소학 新訂 尋常小學》(1896)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어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교과서 안에 이솝 우화가 자그마치 열일곱 편이나 들어 있습니다. 뭐 지금 교과서도 이만큼 들어 있죠. 또 이 때 ‘혹부리 영감’ 같은 ‘일본 옛 이야기’나 ‘나무꾼과 산신령’(이 이야기를 ‘금도끼 은도끼’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 이야기는 이솝 우화 ‘나무꾼과 헤르메스’다. 이 이솝 우화가 일본을 거치면서 ‘나무꾼과 산신령’으로 바뀌게 되고, 이게 당시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 옛 이야기가 되고 만다.) 같은 이솝 우화가 들어오지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이 이솝 우화는 우리 나라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교과서에도 꽤 들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대게 다 나라 사정이 힘든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럴까 할 수 있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솝 우화가 말하고 있는 정신, 다시 말해 ‘정글의 법칙’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글의 법칙’이 뭔가요,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 아닙니까. 힘 있는 놈이 세상 주인이 되는 것, 이게 바로 정글의 법칙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솝 우화는 거의 다 이 정글의 법칙을 말하고 있어요. <개미와 매미> (우리는 이 우화를 ‘개미와 베짱이’로 알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개미와 매미’다. 이렇게 제목이 바뀐 것은 ‘유교’ 때문이다. 매미의 삶은 선비들이 가장 따르고 싶은 삶이었다. 그런데 게으름뱅이로 나왔으니, 성질이 날 수밖에. 하물며 왕은 매미의 삶을 따르겠다고 매미 날개 모양 ‘익선관’까지 썼는데.) 같은 우화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말해 주는 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굶어 죽는다 하는 이데올로기, 또 일하지 않는 자한테는 한 푼도 주어서는 안 되고 굶겨 죽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만약 도와주었다가는 나중에 도리어 그놈한테 자신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우화라 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토끼와 거북의 경주> 같은 우화도 계급을 감추는 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 듯이 제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일해도 삼성 이재용 씨만큼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화는 된다고 하죠. 순 거짓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좀 억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솝은 원래 이런 말을 하려고 우화를 지었습니다. 이솝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사람인데, 노예였다고 하죠. 그런데 노예라 해서 일만 하는 노예이지는 않았다 합니다. 얼마나 말을 잘 했던지 말 하나로 상대편 기를 팍 눌러 상대가 아무 말도 못 하게 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주인 오른팔 노릇을 한 노예였지요. 그런데 이 때 당시 유럽은 중동에서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사랑이니 박애니 하는 정신이 없고,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통했던 야만 시대였죠. 그렇기 때문에 이솝이 한 말은 무슨 교훈을 말해 주는 우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그 험한 세상을 살아갈 방법, 그 험한 세상에서 나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는 ‘처세술’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카톨릭에서 억지로 해석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참 말도 안 되는 해석이었죠. 이솝은 이런 뜻으로 말했는데, 카톨릭에서 설교할 때 쓰려고 자기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주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주는 지금도 볼 수 있죠. 이솝 우화를 보면 아래에 뭐시라 뭐시라 해석을 달아 놨는데, 거 아무리 읽어도 그 해석이 이상하거든요. 그런 해석이 참 많을 거예요. 이 해석은 당시 그렇게 억지로 붙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아 이 우화에는 이런 교훈이 들어 있구나, 이걸 우리 아이들이 알아야 하는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솝 우화가 다 처세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솝 우화는 한 350편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많은 우화는 리비아나 이집트 쪽 우화라고 해요. <독수리와 농부> 같은 우화가 바로 그런 우화입니다. 은혜를 주고 갚는 우리 옛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우화죠. 아무튼 결론은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우화가 있는데, 어떻게 해서 2500년 전 이솝 우화는 지금도 살아 있고 읽히는 걸까, 이걸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죠. 더구나 이솝 우화는 갖가지 형식으로 다시 나오고 있잖아요. 이건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이솝이 말했던 그 정신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정글의 법칙’ 때문이라는 거죠. 이 막 가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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