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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 | [특집]
진보적 문화 NGO의 미래 시대를 이끈 문화운동, 또 한번 기로에 서다 전북지역 문화대안운동의 흐름과 전개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 (2004-02-19 16:13:11)
문화환경이 급변하면서 문화예술인조직의 역할과 전망에도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시대정신과 담론을 이끌어 가는 변혁과 대안세력에서 보다 폭넓은 역할과 성향을 지닌 다양한 문화예술인조직의 공존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의식의 확산이 이러한 변화를 자극하는 요소다. 특히 ‘문화의 시대’, ‘문화분권의 시대’라는 변화된 시대적 패러다임은 문화예술인조직이 달라진 환경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 문화예술인조직의 활동과 성과, 한계의 토대 위에서 새 시대 새로운 조직 논리와 방향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시대에 동참해 온 전북지역 문화예술인조직, 어떤 단체들이 그 중심에 있었고 그 지향점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되새김은 앞으로 새로운 문화예술인조직에 대한 논의가 어떤 목표와 전망을 갖고 진행되어야 할 것인지 그 단초가 될 것이란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지역 문화운동을 이끈 ‘땅’과 ‘녹두골’ 지금껏 문화예술인 결속체(조직)는 크게 두 가지 역할과 위상을 가지고 분리되거나 대립되어 왔었다. 문화예술인들의 위상과 복지를 향상시켜 나가기 위한 구심점으로서의 문화예술인 결속체, 혹은 문화대안세력의 시대정신을 이어 선도적 저항운동의 맥을 찾아 나서기 위한 결속체로서의 모습이 그것이다. 문화예술인조직의 위상과 역할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민중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후자의 모습이 더 확고하고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적 역할 찾기와 시대정신의 발로, 현장 중심의 활동 등은 창작의 소재와 영감을 추동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동시에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정치·사회적 변혁운동을 지원하는 문화 대안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예술인조직은 ‘창작’과 ‘생산’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영역을 넘어 스스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결속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수하게 문화예술인의 위상을 높이고 친목을 다지는, 그러면서 광범위한 장르에 걸쳐 전국적으로 수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예총) 역시 시대를 관통하며 단단한 결속을 다져온 대표적 문화예술인조직으로 꼽을 수 있다.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논리에서 출발, 예총에 대한 대안세력으로 출범한 것이 민족문화예술인총연합(민예총). 민예총이 현재까지 오랜 생명력을 가진 문화 대안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체로서 뚜렷한 노선과 구체적 현장성을 지닌 문화예술인조직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군부독재 시절 강력한 아우라를 형성하며 고유의 역사와 결을 형성해 온 문화대안운동 세력은 그러나,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을 전후해 정치적 투쟁의지가 수그러들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걷는다. 독재정권 당시 전북지역 문화운동세력은 전국적인 흐름을 타고 몇 개의 소집단과 학내 문화패에 의해 주도됐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전북지역 문화대안운동 세력의 출발은 화가 송만규, 윤양금, 이영진씨를 주축으로 한 미술인 단체 ‘땅’과 학내 운동권세력들로 구성된 마당극 단체 ‘녹두골’로부터 시작된다. 민중미술인협의회보다 일찍 태동한 ‘땅’은 광주, 서울 미술인들과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훗날 민중미술협회의회(민미협)의 모태가 된 단체. 미술패 ‘땅’은 판화와 걸개그림 등 미술이란 매체를 통해 저항과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데 그 활동의 지향점이 놓여 있었다. ‘땅’은 이와 함께 현장 투쟁과 시위, 집회 현장에서 문화적 지원 투쟁을 벌였고, 소몰이투쟁이나 농촌두레 활동 등에 참여해 미술을 통한 ‘의식화’의 선봉에 서게 된다. 미술패 ‘땅’의 창립멤버였던 송만규씨는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운동권 내부의 정치적 역량이 변화하면서 문화운동도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면서 “1983년 문학과 미술이 만나 연합전을 열었는데, 그것이 미술패 ‘땅’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시민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학교를 개설해 전주는 물론 익산과 군산, 서울 등지에서도 미술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에게 미술을 가깝게 하고 정치의식을 높이는 사업을 진행했었다”고 설명한다. ‘땅’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녹두골’ 역시 대표적인 문화운동조직이었다. 대학에서 풍물과 마당극 공연을 벌여왔던 학내 운동권 세력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단체로 섬세하게 현장 지향적인 운동을 벌이며 ‘땅’과는 건강한 경쟁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사회변혁의 중심에 섰던 문화운동의 성과와 한계 1986년과 87년을 전후해 이념 투쟁으로 운동 노선이 분열되기 시작, 문화예술운동 진영 역시 내부 지향점에서 차이가 드러나면서 문화운동세력도 새롭게 재편된다. 이 때 새롭게 조직돼 활발한 문화운동을 벌였던 단체가 미술인모임 ‘겨레미술연구소’와 ‘들바람 사람들’, 노래패 ‘소리꽃’, 춤패 ‘해오름’ 등이다. 문화예술인단체가 사회운동단체와 보다 폭넓게 연대해 나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 이렇게 해서 결집된 역량과 힘을 토대로 각개약진하던 문화예술인조직은 1991년 명실공히 진보적 총괄 예술인조직인 ‘전북민족문화예술운동협의회(전북문협)’를 발족시킨다. 참여단체는 겨레미술연구소, 놀이패 우리마당, 소리꽃, 자유문인실천협의회 등.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가 가장 긴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5년동안 전북문협 의장을 맡았던 송만규씨는 “조직적 문화단체로서의 체계를 갖추고, 전선체와의 결합이 가장 강고한 때가 바로 이때”라며 “문화예술인들의 결속과 단결 면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한 구심체였다”고 말한다. 전북문협을 비롯한 문화운동세력은 대부분 전문적인 예술적 역량을 키우거나 창작활동을 지향하기보다는 정치투쟁적 변혁운동에 그 활동의 지향과 목표를 두면서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 변혁에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탄생을 주도했다는 점에서도 창작 활동에 새로운 흐름과 조류를 이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북문협을 비롯한 진보적 문화예술인조직은 정치적 상황과 지형 변화에 맞물려 조직의 성격과 당위성이 흔들리면서 오랜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걷는다. 이후 전북지역 문화예술인들은 1996년 민예총을 설립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지속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무산되는 경험을 겪는다. 당시 민예총 설립을 주도했던 문화예술인들은 조직 결성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던 원인을 창작인으로서의 개인적 성장과 조직의 전망이 확실한 궤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데에서 찾고 있다. 전북예총을 통해 예술인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다는 점이나 민미협, 전북작가회의 등의 진보적 문화예술인단체가 각기 개별적 활동을 벌이면서, 큰 틀의 문화예술인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다. 급변하는 문화환경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 이후 몇 년의 공백을 거쳐 2001년 전북문화개혁회의가 창립된다. 문화개혁회의는 변화된 문화예술 시장에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정책 제안 등을 그 활동의 목표로 내세워 공개 세미나와 축제 평가, 건강한 토론문화의 정착 등에 일정한 성과를 남기며 시민문화운동을 자극했지만, 조직의 구심력 약화 등으로 지난 7월 ‘발전적 해소’를 결정했다. 문화개혁회의의 발전적 해소는 새로운 문화예술인조직 건설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면서 결국 10월 전북 민예총 창립의 결정적 자극제가 됐다. 진보적 문화예술인조직의 활동 내용과 양상은 시대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다. 시대적 혼란을 외면하지 않고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몸을 실어 예술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에 소홀히 하지 않았고, 사회 민주화에도 기여해왔다. 문화예술을 민중과 대중 속으로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고, 현장 밖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창작에의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군부독재의 시대나 운동권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던 이념의 시대가 가고, 21세기 ‘문화’가 그 자체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중요한 영역으로 부상했다. 지난 시대에는 문화예술인조직의 자발적인 ‘희생’과 사회적 소명의식이 있었지만, 문화예술이 그 자체로 힘을 갖는 사회에는 문화예술인 개개인의 창작력과 전문성의 확보가 더욱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의 시대정신만으로 예술인들의 소속감과 결속력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인들의 창작여건 개선과 위상 제고, 결속 등이 ‘사적’인 영역에서 추구해 나갈 문화예술인조직의 역할이라면, 문화예술 지원금 집행에 대한 감시와 비판,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비평과 평가, 문화예술 정책의 건강한 제안과 비판 등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역할이랄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또는 건강한 문화예술인조직이 필요한 이유다. 문화대안운동의 시대정신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전북 민예총이 출범했다. 급변하는 지역문화환경 속에서 진보적 문화예술인조직의 성격과 지향을 어디에 둘 것인지, 시대를 읽는 현명함과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할 시점이다. 다양한 목표와 지향을 가진 문화 NGO들의 등장과 시민문화의 성장, 산업의 영역으로 들어온 ‘문화예술’, 이에 맞춰 다양하게 구상, 집행되고 있는 문화예술정책. 건강한 문화예술인조직이 급변하는 시대와 어떻게 조우해 나갈 것인지, 지역문화예술의 미래를 제시하는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인터뷰, 박스 처리- “문화예술인조직, 창작 기획과 정책 비평이 핵심 사업” 문화대안운동의 중심에 섰던 화가 송만규씨 198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전북지역 문화대안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화가 송만규씨. 그는 1983년 시·그림 연합전인 ‘땅전’을 시작으로 이후 진보적 미술인 단체인 겨레미술연구소와 민족미술협의회, 전북문화운동협의회, 전북문화개혁회의를 태동시키는 데 산파 역할을 맡아왔다. 시대를 관통해 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대중적인 문화예술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문화예술인조직의 새 틀이 필요하다는 최근의 공론화 열기와 전북 민예총 출범을 앞두고 그 감회가 남다르다. 그는 군부독재시절 문화대안운동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하고 사회 변혁을 이끌어낸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고 자부하지만, 변화된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적응해 나가는 능력은 부족했다고 털어놓는다. 이러한 반성을 토대로 지방분권 시대에 맞춰 지역문화의 발전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인조직이 보다 적극적인 정책 생산과 비판자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보적이고 투쟁적인 변혁운동의 중심에 섰던 문화대안세력은 조직내부의 문제나 정치성 등에 한계를 드러냈고, 문민정부를 기점으로 정치투쟁 지향에서 변화된 시대에 맞춰 조직적 대안을 특별히 마련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제 문화분권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자기 이해에 급급하지 않고, 문화분권을 올곧게 정착시켜내는 주체세력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문화예술인조직이 정책 생산과 비평, 창작 기획이라는 두 가지 사업을 핵심적으로 추진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개인과 장르별 창작 역량을 지역문화의 역량으로 모아내고, 문화정책이 올바로 입안될 수 있도록 평가작업을 확실히 할 때 지역문화예술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설명. 그는 “현장 투쟁가로 활동했던 시절, 화실에서 창작인으로 남았던 동료 미술인들이 곱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들이 화폭에 담아냈던 당시의 사회상이 훌륭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송만규씨는 지난 1988년 전국조직이었던 민족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에서 활동하다 평양축전에 대형걸개그림 슬라이드를 보내려다 당국에 적발돼 구속, 수배되는 등의 굴곡을 거쳤다. 지금은 순창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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