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 | [문화시평]
인류의 미래에 대한 회화적 말 걸기
최만식 개인전
글 최광열 화가
최광열/1960년 부안에서 태어났다. 군산대 미술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2004-02-19 16:03:52)
예기치 않게도󰡐최만식의 전시를 보고󰡑글을 써 줄 수 있느냐는 원고 청탁을 받아서 사실 엉겹결(기쁘게)에 글을 쓰겠다고 수락했다. 뭐 너도 나도 글을 쓰는데 나라고 굳이 글쓰기의 결벽성만 간직하고 쓰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글쓰기라는 것이 반드시 논문과 같거나, 나무뿌리와 같은 맥락이 있어야만 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미술에 관계된 글들 중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개 말재간에 불과하던데, 혹시 나도 그렇게 뜬구름같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잡글을 써보기로 하겠다.
토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예술회관 뒤쪽에 덩치 큰 차를 가까스로 주차하고 2층 계단을 오르면서 몇 년 전 여기에서 내가 뭔가를 보여준다고 포장박스를 어깨에 메고 이 계단을 기어올라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렇게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필연성이 있었던가).
최만식의 전시공간에 들어서면서 첫 느낌은 후덥지근한 습기와 그 습기를 건드리는 에어컨 소리였다. 그리고 벽과 천정의 낡고 누르스름한 공간과 함께 황토색으로 주조되고 뼈들이 들어있는 그림들이 어릴 적 보았던 공동묘지를 연상시키며 썩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었다. 가운데로 곧장 들어가 전시장 전체의 분위기를 둘러본 다음 그림들을 차근차근 들여다볼 심산으로 한 쪽 벽으로 향할 때, 나와 동행했던 나의 처는 마치 자동기계와 같은 동작으로 몸을 돌려 옆 전시실로 방향을 잡아 이동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주의깊게 그림들을 보고 무엇이건 읽어보려고 애를 썼다. 사실이지 나는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몇 가지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이미 이 전시의 성격을 대충 파악했기 때문에, 내가 이미 발견한 것과 다른 양상과 요소를 발견하기 위하여 무척 심혈을 기울였다. 너무나 평범한 디스플레이 방식(평범한 디스플레이가 그림의 질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과 하나 하나의 그림은 비교적 완성도 있게 그려져 있고 주제를 강조한 서사적 그림이었다. 출입구 근처의 안내 테이블에서 카달로그 하나를 들고 다시 한 번 눈에 띄는 몇 개의 그림을 보다가 카달로그를 열어보니 ‘자연, 문명 그리고 인간의 묵시록’이라는 타이틀로 유근오 씨의 전시서문이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테이블 한 쪽 끝에 1,000원이 적혀 있길래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작가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중고등학생들이 워낙 마구 집어가길래 적어놓았다고 하면서 그냥 가져가라고 해서 그림 잘 보았다고 인사하고 전시장을 나왔는데, 굳이 이 전시장의 작가와 그림에 대하여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전시장에서 나의 지각과 감관에 어떤 것이 생겼는가.
생태학과 지질학으로 물질연관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이 있다. 이를테면, 생물도감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화석, 지오그라픽이나 과학잡지의 사진 이미지, 정신분열·SF·공포영화 이미지, 지도, 지구생물의 연대기, 탐사우주선, NASA 등과 같은 자연사와 문명의 사건 자료들을 접하면서 최만식은 어떻게 ‘미술로 말걸기’를 하는가. 흔하게도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인간두뇌의 기억장치는 종종 희망과 절망이라는 감정과 관념을 형성한다. 대개의 경우 그 관념은 주체적이고 의미론적이어서 신과 인간의 동형동성론으로 유도된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생태계에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생명현상을 분류하는 과학적 체계는 누가 만드는가?
최만식은 거대서사적 이미지로 작업을 한다. 그가 발견해 낸 회화적 사실과 자연의 어떤 모습들 그리고 인류역사의 기호작용에 대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모종의 반성적 사고를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가 전시 타이틀을 ‘자연, 문명 그리고 인간의 묵시록’이라고 했듯이 그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무언가 가치판단에 개입해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단지 그림의 몇 가지 서술적 한계 속에서 관객에게 말걸기를 하는데, 이미지들을 주로 나란히 병치시키거나 도식적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서사적인 도상 이미지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묵시적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작업과 함께 자신의 그림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하는 태도나 관념이 인류의 물질 과학적 진보에 대한 믿음에 경종을 주기 위한 잠언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방식으로 인간(작가)은 각성되는가?
최만식의 그림 중 하나는 몇 개의 좌표들을 구성하고 있다. 좌우에 공룡과 인간의 두개골, 그리고 그 밑으로 위 도상의 환경이라고 간주하는 풍경이미지를 각각 배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각각의 층위들은 특별히 융합되고 침투하거나 리듬을 부여하고자하는 의도가 없어 보이며 단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여러 개체들은 크기와 채도조절에 의한 담담한 붓자국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이끌 뿐이다. 그렇다면, 관객으로 하여금 각각의 단편들을 알아서 적절히 스스로 섞어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화면에 긴장감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찌보면 회화적 긴장감에 대한 의도가 있어도 지나치게 소재중심적이어서 화면자체의 기운이 약해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은 전시장에서 가장 잘 눈에 들어오는 지점에 무척 큰 크기로 제작하여 대표적인 위치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어떤 그림은 영화스크린과 같은 빛의 막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그곳에 공룡뼈가 투영되어 있어서 공룡뼈를 왜 이렇게 각인시키려고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모든 그림에 두개골과 뼈는 특별히 핸디코트를 사용해서 부조와 같이 처리하고, 뼈의 자연색으로 다시한번 강화시켜서 바로 그 해부학적 형태를 드러내 보여준다. 지도나 고고학적 색인들은 배경을 형성하여 그 뼈들에 존재감을 느끼도록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하며 비교적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어떤 부호와 글자의 장치와 더불어 개념적이기도 하지만 교훈적인 내러티브가 있어 보인다. 그러한 그의 도상은 상징성을 내포한 서사적 이미지의 연관들이고 미술에 대한 계몽적이며 구조주의적 역사관을 드러낸다. 인류의 진화와 멸종 그들의 환경과 생명현상에 대한 통시적 접근은 거창해 보이는 반면에, 그가 그린 검은 발자국의 구멍과 같이 한편으로 공허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림과 더불어 역사를 관조하고 있으며, 신의 심판을 고대하는 것과 같이 그림의 내러티브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지점에서 최만식의 이미지와 더불어 지금 우리들을 사로잡고 사로잡으려는 기표작용의 현대적 실상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영상매체와 더불어 현대의 기계복제 산업사회의 가상현실세계에서 가상 이미지는 더 이상 가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상과 실상의 구분은 무의미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이미지는 허구일 뿐이지만, 그 허구 이미지는 실제와 얼마나 닮았느냐와 같은 기표·기의작용에서 의미생성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 단지 생산할 뿐이다.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갖가지 ‘배치물’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나는 표현할 뿐이다. 역사는 가상적 실상이고 실상적 가상이다. 이런저런 생각은 결국 이렇다. TV나 영화이미지의 신체적 힘과 한편으로 어떻게 회화적 이미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이다. 미술의 제도적 맥락과 함께 모든 것은 미술이 될 수 있으며 어떤 미술의 힘과 관계없이 어떤 것이든 미술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회화적(그림) 신체의 강렬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다.
우리는 공상과학영화에서 핵전쟁이나 행성충돌 등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거나 위기에 처하는 장면들을 자주 겪으며(감상?), 어떤 생생한 입체영화 속에서는 영화와 한 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상현실과 함께 가는 그림,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강렬하게 되고 그만큼 감각의 출구를 개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의 맥락이 자꾸 게걸음같이 되어가고 있으나 어쨌거나, 최만식의 이미지는 역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으로 해석될 소지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해석과 그의 메시지는 회화적 힘과 깊이 조우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말(글자)과 사물에 대한 의식세계의 거추장스러움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