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터미네이터 3>
복(伏)날, 블록버스터가 주는 환상
문화저널(2004-02-19 15:52:24)
원하는 카체이싱 장면을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한다. 부순다. 기찬 테크놀로지에 그럴듯한 내러티브를 겸한 데다 사유의 논쟁까지 끌어들이는 영화 <매트릭스2>를 만든 형제들은 용감하다. 가히 폭탄(블록버스터)이라 할 만하다. 키메이커가 만든 열쇠를 가지고 파란 문을 탁 열면 제주도 성산일출봉이고 또 빨간 문을 열면 타클라마칸 사막이고 식의 상상력도 봐줄 만하다. 그러나 마스게임 같은 권법은 이소룡에 택도 없고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하늘을 나는 네오의 슈퍼맨 놀이는 <와호장룡>의 대나무 위의 경공술 같은 우아함이 없다. 구식 하드의 기종을 가진 내게 무식한 속도감은 와 닿아도 명상적 사유의 리듬에 이르자니 인터넷을 한참 헤매어야 한다. 싫다. 영화 뒤에 이어지는 숨은 그림 찾기 류의 지적 유희와 말하기 방식들이.
반(反)영웅 <헐크>는 어렸을 때 본 킹콩 수준. 파란 괴물이 되기까지의 가족사는 지겨웠고 후반부의 넓디넓은 대륙의 팬(pan) 장면은 섬 출신 감독의 콤플렉스(오우삼의 <미션 임파서블 2>도 마찬가지다)로 읽혔다. 영화 내내 그 넓은 대륙을 펄쩍펄쩍 뛰는 헐크의 늘었다 줄었다 하는 보라색 빤스 생각이나 하다가 내 안의 '또 다른 나'도 있을 법한데 분노를 힘으로 만들지 못하고서 살아가는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헐크가 되어보나’, 는 쓸쓸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50이 다 된 대만 출신의 한 남자가 어렸을 때 만화로 보았던 오랫동안의 그 꿈을 잊지 않고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아비의 정체성에 대해서 헤메는 나라에 대한 환유를 보여주는 정도를 고맙게 생각했을 뿐.
아, 12년을 기다린 <터미네이터3>! 천지창조의 아담 같은 탄생 자세의 인트로는 간단하고 100톤의 크레인으로 치고 부수는 클라이맥스는 길다. 날도 더운데, 쉬워서 좋다. 무식하게 쓸어버리는 폭력의 극대화에다 "절망보다는 분노가 쓸모 있다."는 둥의 대사를 치는 말의 성찬까지 버무리는 할리우드 폭탄의 파편은 장화와 홍련 등의 한국영화를 여우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뜨린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면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고 배워왔고 아직까지는 실천중인데 징허게 이쁜 살인병기 T-X와 가죽 로봇이 화장실에서의 꺾고 부수는 이종격투기 장면은 여름날 천렵 매운탕 맛이다. 그래, 감독 너도 한 가락 하는 마초군.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로 미래 지구방위 사령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내게도 터미네이터가 찾아와서 미래를 한 수 가르쳐 준다면… “그 신문들? 별 것이 다 궁금하군. 열흘 붉은 꽃이 어디 있겠어? 다 기울었지”, “그 때 방조제 쌓은 사람들이 바위 하나씩 걷어내고 세 번 절하던데”, “너 이제 정말 좋은 글 쓸 찬슨데 계속 담배를 물면 넌 폐암이야”. “심은하가 네 글의 팬인데 모셔올까?”한다면, “T-800, 교련복 시대로 좀 가 주게. 가서 그날 도청의 윤상원에게는 방탄조끼를 입히게, 아 또, 평화시장에서 몸을 사른 청년에게는 소화기를 대령해.” “음, 혹시 장발의 나를 만나걸랑, 매달리지 말고 의연하게 돌아서라고 충고해 줘.” “그녀에게는?” “그냥 내버려 둬”
슈퍼맨·원더우먼·배트맨·스파이더맨·600만불의 사나이와 터미네이터 등의 영웅 전설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를 보면서 내 인생은 흘러왔다. 중증 중독이다. 그들이 꾸며낸 영화와 만화로 만들어진 사악한 책략의 많은 텍스트들은 신화가 되고 속편에 속편은 이제 아들세대로 이어지는 오늘. 옛날 영화인 노조를 탄압하던 덜떨어진 배우가 대통령을 두 번이나 했다는 그 나라에 이제 장총에 오토바이 탄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란다. 아니, 그렇다면 혹시 이소룡의 죽음은 후일 그가 중국의 대빵 아니 세계의 겁나는 지도자가 될까봐 스카이넷을 지배하는 미래괴물이 와서 죽인 것은 아닐까. 재벌아들치고는 쓸 만한 데에 돈을 쓴 그를 12층에서 바닥으로 등을 떠민 괴물은? 내가 사는 이 매트릭스는 추락한 한 남자를 받아주는 슈퍼맨이 없다. 다만 속고쟁이 들추어 찢어발기는 우리나라에 복(伏)날은 간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