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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와사람]
작가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확신이 아쉽다 SPACE IN SPACE
이건용 군산대 교수·토탈 아티스트 (2003-04-07 10:43:09)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이형진, 정광진, 조해준의 3인의 설치 영상전이 6월 27일부터 7월 9일까지 있었다. 이들 20대의 작가들은 영상매체를 통한 전시공간에서 설치적 정보 교감을 의도하고 있다. 조해준의 경우 그가 살고 있는 주변공간을 슬라이드로 촬영하고 그 필름 위에 드로잉하여 보여주는 것과 서신갤러리에서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비스켓 위에 초코렛으로 써서 각자 찾아먹게 하는 등 두 개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의 최근 작업들은 이중적인 양태를 보여주고 있고 이번 전시에서도 두 개의 유형작품 사이에서 자신의 예술적 입장을 모호하게 하거나 이중적 과욕(?)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다음단계로 넘어가고 싶거나 이제까지 지속해 왔던 어법에 한정하기를 거부하고 싶은 증상을 노출하고 있다. 예술이란 방법론적 과시욕에서부터 나오는 정치적 움직임이나 갈등에서 벗어나 있을 때 진정한 소통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는다"(과자)는 것과 주변의 공간으로부터 소재적, 방법적 예술사냥 행위로서의 "먹는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혼돈하고 싶거나 그로인한 어휘적, 퓨전적 혼란을 즐기고 싶은 듯 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적 행위 자체도 예술 문맥상의 교감이나 비판이 동반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자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점에서 이현진의 '버드나무'는 문맥상 간결하고 솔직하지만 느낌이 단순하고 이유있는 묘미가 있기도 하다. 그의 상단으로부터 매어달린 설치적 장치와 겹쳐진 버드나무 영상은 녹취되어 들려오는 바람소리, 새소리 등으로 "자연이 주는 시원함을 전달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매체임에 틀림이 없다"는 작가의 생각을 적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그 이상 무엇을 발견하기 힘들다. 잠시 인공 과일향에 후각을 내맡긴 것과 같이 다만 "다른 공간과는 차단된 무한한(?) 휴식과 낭만적 감상을 제공하여 주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정광진의 '인스탈레숀 2001'은 구조적 측면에서 감시자의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원형감옥(panopticon)의 구조와 유사성을 갖는 점이 보여 구조나 보여주는 방법이 푸코적이나 내용은 오늘날 정형외과의 성형수술로 인한 표준화·획일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중앙의 블랙 탑 중간에 비추어진 한 인물의 영상은 이미 성형수술이 끝난 상태인, 붕대를 감고 있는 얼굴을 비추고 있고 바닥 여기저기 널려있는 네모난 블랙 상자안에는 기계로 찍어낸 붕어빵의 영상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탑 꼭대기로부터 4개의 움직이는 감시불빛은 붕어빵 영상을 감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광진의 경우,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설치방법이나 무게에 비추어 보여주고 있는 정보가 너무 차이를 갖기 때문에 올랑(Orlan)과 같은 충격적, 자기자신의 얼굴 성형수술이 예술의 품목으로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붕어빵으로 은유되는 간접화법의 정보만으로서는 장치와 정보사이에 차이가 느껴진다. 이들 3인의 영상적 설치전은 여러모로 서로간의 개성을 갖지만 서로 다른 반성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조해준의 경우 슬라이드 필름을 통한 자기 삶 주변부적 영상위에 침투하고 있는 드로잉적인 사고와 영상적 개입이 일상과 예술의 밀교(密敎)적 긴장감과 영적 예감력을 느끼게 하는 점이다. 그의 불가해한 예술정보적 영감은 슬라이드 영상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불가해한 영상적 정보량은 우리를 주변부의 사물에까지 범신론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착각을 주고 있다. 그만큼 그의 암호적 마취력과 흡인력은 유효하다는 확신을 작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작가의 일이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자기방법적 하나의 발전에 불과하며 그것이 자기 정체성을 띤 언표(言表)의 최종적 지점이라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자기 방법 또는 표현상의, 태도상의 확신이 요구된다. 정광진의 경우 오히려 방법론이 앞서있기 때문에 담겨진 내용이나 메시지가 빈약하다는 우려를 갖게 하고 관객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그의 거창한 구조물 사이에서 배회하게 한다.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과 설치적 어법 사이의 껄끄러움이나 어려움은 작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경우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여주려는 내용의 컨셉이 확실하다면 구태여 그만한 거창한 장치가 필요하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오늘날 우리 일상의 주변부로 무섭게 확산된 성형수술의 유행현상 때문에 자기 정체성에 대한 파괴와 붕어빵 같은 획일화로 몰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우리는 얼마후에 만난 그가 과연 얼마전에 만난 그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형수술이 급격히 확산된 문화현상에 당황하고 있다. 하지만 정광진의 경우 붕어빵을 등장시킴으로서 복제와 변질 사이의 리얼한 위기감을 은유적 간접화법을 통해서 둔화시킨 점과 그 둔화화법과 무거운 보여주기 설치 방법 사이에 정보적 부재의 차이를 가져온 점은 보다더 치열한 작가적 정신이 요구되는 점이다. 이에 비하면 이현진의 경우 방법적 설치의 기법과 전달 사이에 껄끄러움이 없다는 점이 소통의 지점을 열어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선한 발상이 그 자체로 최종 도달점이기보다 그 이상의 지점을 설정해 봄직도 하다는데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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