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 | [문화와사람]
끗발 낮은 ‘땜쟁이 국장’의 숨겨둔 무기
유기상 전라북도 문화관광국장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
(2004-02-19 15:39:00)
전라북도 제2청사 1층 문화관광국장실. 매미소리가 열린 창 너머에서 요란하게 뒤엉킨다. 한 여름 삼복더위에도 그는 에어컨대신 자연바람을 맞고 있다. 사무실 창만 열면 제법 울창한(?) 숲이 있어 근무환경은 톡톡히 부러운 지경이다.
지역 문화행정을 이끌어 가는 막중한 자리, 도 문화관광국장을 맡고 있는 유기상씨. 사람 좋은 웃음이 늘 넉넉한 그에겐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열린’ 공무원, 그리고 ‘여린’ 공무원. 문화예술계나 공무원 사회 안팎으로 들려오는 풍문(?)을 종합, 압축한 표현인데, 여기엔 카리스마보다 인간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그의 성정이 배어있다.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여전한 때에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인 그를, 문화예술인들이 좋아하는 공무원으로 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화적이면서 겸손한 공무원. 그러나 그를 주목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역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린 마인드, 그리고 시대 조류에 적응하려는 유연한 자세에 있다. 근래에는 ‘문화관광 직렬’제나 계약직 전문 공무원제도의 확대, 적용 등에 관한 그의 시도가 구체화되고 이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을 제안해 더더욱 그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문화예술이 경쟁력 있는 분야로 떠오르고 있고,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문화관광 직렬제는 공무원 시험부터 전문성에 맞춰 영역이 분류되고 그렇게 해서 뽑힌 사람들이 문화관광 관련 업무에서만 순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행정자치부에서 법령과 제도적 틀을 마련해줘야 가능한 내용입니다만, 우선 필요성과 당위에 대해서는 제안을 해 둔 상태입니다. 계약직 전문 공무원은 조례규칙을 바꿔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나갈 계획입니다.”
그가 구상하고 제안한 이 두 가지 제도는 대승적이고 열린 자세가 아니라면 쉽게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특히 계약직 전문 공무원의 채용은 일반 행정 공무원들의 설자리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에 대대적으로 채용한다면 내부에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천천히 설득하면서 가야죠. 하지만 영상산업이나 관광홍보는 전문가들의 안목과 실행력이 절실한 상황이에요. 시대도 변화하고 있고요. 공무원들도 이런 변화에 열린 자세로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도 전체 상황을 볼 때 문화재위원 이외에는 전문 공무원이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직렬제가 빨리 정착된다면 공무원들의 문화 전문성 확보나 순환보직제의 폐해를 막을 있는 제도적 틀이 마련될 수 있게 됩니다.”
아직은 공무원 사회가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 그러나 유 국장의 이러한 제안은 공무원 사회가 서서히 ‘녹는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긍정적 징후로 받아들여진다.
“70, 80년대는 공무원이 일반 대중을 이끌어갔던 시기지만, 지금은 민간이 행정 공무원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거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저도 열린 생각을 갖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과 문화예술인,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고요. 지금은 그런 공무원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다만 우리 노력보다 세상의 요구가 더 빨리 가고 있으니... 쉬운 일은 아니죠.”
현장의 분위기나 시민,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는 그것이 공무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문화관광과 직원들에게 틈만 나면 행사장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곳에 자주 발걸음 하라고 주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직원들에게 공무원으로서의 자부심이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문화관광 분야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승진 문턱은 높은 기피부서. 때문에 공무원들에게 문화관광부서의 매력과 실질적 인센티브가 부여되는 제도적 틀을 갖춰놓는 게 그의 또 다른 소망이자 과제이기도 하다.
“부서 서열 면에서 보면, 얼마 전까지 문화관광 분야는 끝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중간만큼은 왔어요. (웃음) 문화관광과를 떠나가고픈 부서에서 머물러 있는 부서, 그리고 자리의 가치가 커지는 부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부서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지난 1977년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문화관광과의 일을 맡아온 지 6년. 문화관광분야에서 내리 6년을 근무했다는 것은 자치단체 공무원으로선 이례적인 기록이다. 기피부서에 ‘서열’도 낮은 자리인지라 그렇다. 그는 전주시 문화관광국장으로 있다, 올 초 전북도로 자리를 옮겼다. 꿋꿋이(?) 그 분야를 지켜낸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자리다툼이 치열한 직책이었다면 아마 저한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남들이 잘 오지 않으려는 자리라서 이나마 오래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입니다.”
정말로 정말인지 아닌지를 떠나 겸손도 지나치면 예의에 어긋난다 했거늘, 받자옵기 민망한 소리를 진지하게 한다.
오랫동안 전주시 문화관광과에 근무했던 그는 지역문화에 새 바람을 몰고 온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전주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차원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전주 한옥마을 조성은 전주시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이다. 전주 한옥마을 조성, 전주국제영화제 등 전주시의 전통문화와 문화예술 자원이 구체적 사업으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나 전국적으로 모범이 되고 있는 전주시 문화관광과 계약직 전문 공무원제도의 시행 및 정착에도 그가 중심에 있었다. r
“전주는 잠재 자원이 많은 곳입니다. 구슬이 많은 곳이니 잘 꿰기만 하면 됩니다. 교동 한옥지구에 들어선 문화시설은 전주 문화를 알차게 엮어갈 수 있는 신호탄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봐서도 그 당시 의미 있고 적절한 시도였지 않나 싶어요.”
문화예술이나 문화관광 분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문화행정의 최 일선에서 일해온 그의 평가다.
“사회 전반에 문화예술이 산업적 부가가치를 높이는 경쟁력 있는 분야라는 인식이 높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들어가면 아직 벽이 많아요. 외부적인 인식과 실질적 행태가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투자우선순위에서 문화예술은 항상 밀리는 상황이니까요. 아직도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낭비나 사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게 가장 큰 벽이죠.”
게다가 당장 눈앞에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사업 분야의 특성상 문화관광국장이라는 직책은 그에게 늘상 버거운 짐이다. 공무원 사회에서 그리 ‘끗발’이 높은 자리도 아니거니와 나름의 자리 부담을 안고 있긴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열린 자세, 그리고 지역 문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상징적 서열은 높지 않지만, 예향에서 문화관광 업무를 본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전라북도의 미래산업, 주력 분야에서 근무한다는 게 저에겐 부담이면서 보람이고, 긍지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일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건 큰 자부심이죠.”
‘남들 싫어하는 부서의 땜쟁이’ 운운하며 “그냥 주어진 자리가 좋다”고 싱겁게 말하던 그이지만, ‘자부심’이라는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문화=다양성, 이라고 정의하는 유 국장. 지역 문화예술을 꽃피울 자양분 속에 그의 역할과 자리도 어느 한 켠 소중하게 담겨져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지 않기를 바란다. 언제나 열린 마음과 유연한 자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