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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 | [문화시평]
사진과 역사적 기억의 조우 조지 로스(George Rose) ‘1904, 호주가 본 한반도’전
글 김정우 중부대 사진영상학과 겸임교수 (2004-02-19 15:35:26)
사진 안에서 살아가면서 사진 탓만으로 흥미 있는 일들이 항상 넘쳐나는 건 나의 행복이다. 빛바랜 중학교 학생증의 꼬질꼬질한 내 얼굴에서 내가 놀라고 비싼 값에 찍었을 웨딩사진의 한없는 촌스러움에 웃고, 전혀 연고 없는 어느 시골집 안방에 붙어있는 수많은 기념사진들의 가족사에 감동하기도 한다. 나처럼 나오지 않은 내 증명사진을 흡족해 하던 내 모습까지도 내가 즐거워하는 일상의 사진이야기이다. 분명 사진은 우리들 가까이에서 익숙한 생활용품의 하나일 테지만 무언가 다른 구조와 특징들로 우리에게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사진의 현대예술에서의 비중은 나날이 커져가는 현실도 내 사진사랑의 한 보람이다. 사진은 또 복이 많은 매체이다. 당장 의미 없어 보이는 어떤 사진도 세월이 흐를수록 시간의 먼지가 두께를 쌓아가며 새로이 핵 융합하는 아우라들로 새롭게 빛을 발하는 매체적 특성도 사진이 누리는 행운이다. 어머니의 처녀 때 사진, 뵌 적 없는 할아버지의 증명사진이나 부모님 결혼식 사진, 수학여행의 단체사진, 어릴 적 백일사진이 그랬다. 이는 사진의 본질인 영속되는 시간의 단면과 그 시절의 존재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까마득한 망각 속에서 아련한 추억들을 끌어내며 향수까지 덧씌워주는 마력 때문일 것이고 이 또한 행운일 것이다. 사진 속 이상한 세상과 그 사진이 누리는 행운(?)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 그 해답은 매체의 구조이다. 대상의 실제와 재현이라는 상호관계의 태생적 관계와 만남은 이미지 형성에 부득이 인간의 시각과 재현된 사진 사이의 의미설정이 필요할 듯싶다. 인간의 시각체계와 사진은 다만 유사할 뿐 둘은 결코 같지 않음이다. 이런 까닭에 육안과 또 다른 구조인 사진 이미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아우라로 재창조되는 속성을 지닌다. 3차원의 공간이 2차원의 평면으로 상징되는 차원의 문제나 연속 무한의 공간이 단절된 4각의 프레임으로 정교하게 잘려지는 특징,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움직임이 과거 한순간으로 미동마저 멈추어버리는 특징까지도 이상한 사진세상의 원소들이다. 이는 또한 인간의 시각능력보다 우월한 테크닉의 의미도 갖는다. 시력보다 더욱 정교한 대형카메라의 선명도나 대형 광고판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위압감, 렌즈들의 다양한 원근감과 그 과장 그리고 축소, 극단적인 접사촬영, 천체사진, 수중사진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런 능력(?)과 태생이 새롭게 의미되는 사진이라는 함의공간을 만들어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들이 관여하고 작용하며 메시지를 증폭하는 것이다. 지난 7월 25일부터 8월 5일 동안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우리가 접했던 ‘1904, 호주가 본 한반도’ 호주 사진작가(?) 조지 로스(George Rose)의 사진들은 기록성의 사진이다. 사진에서의 기록성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며 사진은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사진으로 찍히는 것은 있는 것이거나 있었던 것을 뜻한다. 인물이나 풍습, 길거리 건물들을 찍으면 그것이 기록이 되어 역사성을 갖게 되는 것도 동시적인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리얼리티가 기록으로서 사진의 더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조지 로스의 사진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지금의 '순간'을 구성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어떻게 '현재성'을 인식하는지를 살펴보는 사진들이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전시 의도도 이 사진들이 어떻게 기억을 되살려 지금의 순간을 구성하고, 또한 그것이 어떻게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자리하는가를 살피는 기억의 역사화라 할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열되고 파편화 된다. 때문에 사진이 어떻게 기억의 코드화 방식에 부응하는가를 살피는 것, 그 기억의 메커니즘으로서, 이 사진들이 사진과 기억간의 코드화 방식을 살피는 소중한 단초가 됨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의 손으로 남기지 못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가 외국인의 시선으로나마 남겨졌다는 안도감과 일제지배 초기의 우리민족의 삶의 모습과 당시의 시대상이 오늘이라는 동시대에 고스란히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옴도 감동일 것이다. ‘1904, 호주가 본 한반도’의 사진에는 참 많은 사진적 메커니즘의 아이러니와 나름의 적절한 우연성이 함께 하기도 한다. 사진을 작업하는 나는 상상처럼 조지 로스의 작업을 추측한다. 수많은 촬영장비와 암실장비들로 그 일행의 이동은 한정적이었고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개화기의 서울, 평양, 인천의 모습은 상당히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느린 감도(필름이 빛에 반응하는 속도)의 필름 탓으로 삼각대에 얹어 촬영했을 테고 그런 이유로 저속셔터는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분위기가 담겨졌을 것이다. 또한 밝지 못한 렌즈 탓으로 조여진 조리개는 근경으로부터 중경, 원경까지 깊은 초점면을 형성하여 더욱 많은 디테일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래서 드러나는 멀리 명동성당, 먼 산의 벌거숭이 민둥산, 장터의 일본식 건물과 한국인들 속의 일본인들, 인력거와 쌓여있는 짐 보따리, 장터와 거리를 메운 우리민족의 삶에 굳어진 표정이 담기고 빨래터에서 발을 씻는 아낙네의 모습이 오늘의 시간 앞에 1904년 역사의 화석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개발한 카메라 입체사진의 생명은 공간감이고 입체감이었으니 피사체에 접근방식도 항상 대각선의 측면이고 사선의 프레임을 구성하여 극히 디자인적인 공간구성 현대적인 세련미로 과거의 기록이며 향수라고만 치부해 버리지 못하는 놀라운 예술적 미학이 함께 하는 것은 우연일 수만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긍정과 감동에서도 기획 의도와 전시 방식, 그리고 사진들의 용도적 전이나 조지 로스의 작가적 포장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을 달리해야한다. 사진사 속에서 조지 로스를 사진작가로 인식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에서 기인한다. 우선 그의 사진에서의 역할은 발명가로 인식함이 적절할 듯싶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기록적 사진을 작가적 작품으로 포장하기보다는 여행가의 호기심에 기인하는 시선으로 그러한 역사성과 자료적 측면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호주의 사진들은 그의 발명품인 입체사진술을 위한 상업적 홍보 목적으로 제작한 사진들로 생각되고 그 사진의 질도 원본이 아닌 복사사진 탓으로 지극히 조악한기까지 하다. 이처럼 제작의 의도에서나 성격에서 연계성이 희박한 두 종류의 사진들이 한 사람이 촬영한 사진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1904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공간에 둘에 하나의 묶음으로 엮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동시대라는 공통분모와 그 시대상의 비교라는 자료적 측면을 인정치 못함은 아니고 그 사진의 정교함(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사진으로 국한되지만)이나 그 향수의 감동마저 평가절하 함이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아울러 전시방식에서 서술된 텍스트에서도 지나치게 자의적인 서술이나 마치 그랬을 성싶은 추측적 설명은 분명 우리의 현대사의 역사적 격동성에서나 의미되어질 따름인데 마치 그 시기에 조지 로스의 의도나 견해가 그러했던 듯 포장해감은 적절치 못한 태도가 아닐까하는 의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입체사진을 위해 제작된 사진이라면 두 장의 사진이 완성된 하나일 것이다. 두개의 렌즈를 통해 보이는 두개의 사진이 특수입체경을 통해 입체사진으로 보이는 그 태생적 구성이라면 그 중의 하나의 사진으로 새로운 의미의 구성을 달리함에는 문제 있음을 지적함이다. 이번 사진전을 통해 1904년 한국의 풍경과 동시대 호주의 풍경을 함께 감상함으로 일본과 서양세계에 의해 변화하는 우리의 잊혀진 역사의 단면을 읽어보고자 한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던 이 전시는 물론 지난 시간의 향수라는 측면에 충분한 의미와 기쁨의 시간이었고, 1904년 초기의 열악함에도 당시 그 기술적 정교함에는 분명 감동이었다. 더군다나 문화적 소외를 절감하는 지역적 한계에서 그것도 척박한 사진문화의 갈증에서 말이다. 안타까움은 텅 빈 전시장과 짧은 전시기간 그리고 적절히 홍보치 못한 이유만으로 이 훌륭한 문화적 체험이 또 그렇게 소수의 문화적 향유로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하는 공간으로 문화 생산과 소비자의 활기 넘치는 문화장터 ‘애향 전주’ 그 날을 위한 보부상의 등짐을 꾸려본다. 김정우/중앙대 사진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순수예술사진을 전공하고 중부대 사진영상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느즈러짐의 공간 校洞’(2000), ‘PARADOX IN SEOUL’(2002년), 그리고 여백이 있는 풍경 ‘空’(2003년) 등 개인전을 가졌다. 조용준 사진전, 성남훈 사진전등을 기획했고 전국체육대회 문화행사인 ‘전북체육 역사사진전’에 기획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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