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그 어느 날, 그리고 또 그 어느 날
글 김용택 시인
(2004-02-19 15:32:14)
나만큼 인생을 무계획적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되어보겠다는 내 인생의 설계를 하고 그대로 실천해 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살았다. 살다보니, 그 누구나 다 겪게 되는 인생의 고비와 구비를 지나 외로움과 괴로움을 그리고 절망을 견디며 살게 되었다. 나는 인생이 그 얼마나 하찮은가를 일찍 안 편이다. 인생에 혁혁한 공을 세운들, 또 아니면 그저 그런 삶을 산들 어쩌랴 싶은 삶을 살아왔다. 사람들은 큰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그 뜻을 이루려 애를 쓰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꿈을 다 이루고 죽었다는 사람을 나는 만나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삶은, 인생은 티끌 같은 것이다. 인생은 바람 같은 것이고,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우리 아버님은 일찍 돌아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들이 모여 있는 어느 날 아버님은 어머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이 금방이구만인, 참 허망헌 것이여. 바람 같은 것이구만인-" 나는 이 말이 지금도 내 귓전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다.
나에게도 느닷없는 인생의 고비가 있었고, 내 인생이 전부 뜯어고쳐지는 때를 몇 번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학교에서 받은 영농자금으로 집에서, 내 집 앞 섬진강에서 오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래, 오리를 3백 마리 키우면 하루에 알이 적게 낳아도 몇 개는 낳게 되겠지. 그러면 알 하나에 얼마야. 그러다 보면, 그래, 그러다 보면 1년이면 돈이 얼마나 되지..... 나는 그렇게 하루 저녁에도 기와집 몇 채씩을 짓고 허물며 오리를 키웠다. 그러다가 폭싹 망해서 서울로 도망가 낭인 생활을 1달간 했다. 견디다 못해 낙향, 순창 동생들 자취방에서 그야말로 무위도식 몇 달간을 지내던 어느 날, 그랬다 그 날은 내게 그 어느 날 이었고 내 인생의 길을 틀어 전혀 예상치 않은 길로 돌려놓은 날이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나보고 선생 시험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싫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비웃지만 친구 철호는 사진만 찍으라는 것이었다. 그 놈에게 끌려간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가 원서를 가지고 와서 써다가 접수를 시키고 나는 시험을 보고, 합격이 되고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선생이 되었다. 참으로 모를 것은 인생이 아닌가. 누가, 내가 선생이 될 줄을 알았겠는가. 인생은 모를 일이다.
나는 1970년 5월1일 드디어 선생이 되어 시골로 발령이 났다. 선생은 봉급 적고, 심심하고, 지루하고, 그리고 나는 인생에 낙담했다. 내 젊음은 까닭 없이 심심했다. 산과 들과, 아이들은 참으로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랬다. 그 날은,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그 깊은 산골까지 어느 월부 책장수가 찾아 왔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양말을 벗고 도랑물을 몇 개나 건너야 하는 그 깊은 산중에 선생도 3명밖에 안 되는 그 학교에 그가 책을 들고 찾아 온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책은 판형이 크고, 목침 같이 두꺼운 6권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들고 끙끙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와서 낮에는 동무들과 산에 나무 가고, 눈 오면 토끼 사냥 가고, 밤에는 그 책을 읽었다. 방학이 끝이 나자 나는 그 책을 다 읽어가고 있었다. 학교로 가기 위해 밖으로 차를 타러 나갔다. 참, 세상은 이상했다. 그 책을 읽고 난 그 뒤에 내게 다가 온 세상은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설렜고, 그리고 삶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 어딘가에 쌓여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것은 처음 느낌 감정이었다. 나는 세상이 새로 보였던 것이다. 늘 보던 산, 나무, 강, 우리 집, 사람들. 아! 세상이 새로 보이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후에서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그 뒤로도 그 사람이 새로운 책을 가지고 자꾸 찾아왔다. 순전히 전집이었다. 10권짜리, 5섯권짜리 책들을 나는 사서 차근차근 읽어갔다. 신나고 재미있고, 그리고 나는 내가 자꾸 커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얼마나 시간이 가고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평론도 쓰고, 사회 비평 글도 쓰고, 되는 대로 내 맘대로 쓴 글들이 때로 내게 감동을 가져다주는 희한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삶, 나는 어느 날, 그랬다. 나는 또 그 어느 날 시를 한번 정식으로 응모해보기로 했다. 그 해가 1982년이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이 나를 시인이라고 불러 주는 신인으로 문단을 나간 것이다. 책을 받아 든 나는 크게 숨을 쉬고 산천을 바라보았다. 평생, 35년을 한결 같이 바라 본 산천이었다. 거기 산, 강, 농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부터 세상을 나가게 되었다.
시인이 되어서도 나는 한번도 내 삶을 설계하고, 이렇게 살아야지 계획을 세워보지 않았다. 나는 살뿐이었다. 살다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다는 어른들의 말대로 세상에는 참 별의별 일들이 많았다. 나는 나에게나 세상에게나 무책임한 사람이다. 나는 우리가 사는 이 넌덜이 나는 야만과 반 문명을 잘 알고 있다. 같잖고 더러운 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덜 떨어지고 어설픈 것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나라를 걱정하는 모양을 본다. 내가 경멸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는 신념이라는 말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아직 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쓴 글은 내 삶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말이다. 나는 내 감정이 담긴, 글을 아직 많이 쓰지 않았다. 내가 글을 써 오고, 세상과 만나 살아 온 일은 작고 보 잘 것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또 변할 것을 안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인류를 향한 나의 희망과 꿈을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내 생각은 무궁무궁 커 갈 것이다. 어느 굽이가, 어느 고비가 내 앞에 남아 내 인생의 길을 바뀌게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굽이와 고비를 또 넘어가며 살 것이다. 우리 어머님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이런 말을 주로 하셨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는 말이었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말로 나는 들렸다. 어머님은 또 늘 살아 있는 생명을 중요시했다. 풀 한 포기 곡식 한 포기 길가에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죽이거나 옮기거나 하시지 않았다. 또 하나, 어머님은 늘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을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이 말들을 늘 되새기고 그리고 다듬고 사는 편이다. 내 노래라면 어머님의 이 말씀이 내 노래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기차도, 버스도, 비행기도 아니다. 나는 길을 따라 가지 않는다. 내가 가는 길에는 길이 없다. 길 없는 길에서 나는 세상을 다 보려고 생각을 넓힌다. 낡고 고루한 내 노래들아 잘 있거라. 나는 오늘도 간다.
김용택/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에 이어 『맑은 날』『그대 거침없는 사랑』 『그 여자네 집』등을 내놓았다. 산문집으로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촌아 울지마』등이 있다. 교편을 잡으며 아이들을 위한 시집과 동화 『옥이야 진메야』 『콩, 너는 죽었다』 『학교야 공 차자』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