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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 | [건강보감]
사랑할 수 있다면, 괴로움도 축복이다
글 김동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2004-02-19 15:30:05)
30대의 건장한 청년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진료실에 찾아왔다. 당황되고 쑥스러운 태도로 무엇을 먼저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야 꺼낸 말은 너무 괴롭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결혼을 앞두고 집안에서는 준비하느라 법석인데 자신은 결혼을 원치도 않고, 결혼 생활이 두렵다는 것이다. 사귀는 여자도 없으면서 선만 보면 한번만 만나고 마는 그에게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여 선만 보기로 했으나 가족들이 일방적으로 밀어 부치는 바람에 날까지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못할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속옷을 훔쳐서 자신의 옷장 속에 비밀리에 숨겨놓는 일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담 밖으로 여자의 속옷이 보이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집안에 인기척을 확인하고 슬쩍 들어가 속옷을 훔친 후에 황급히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가 되고 내 자신이 서글퍼지는 것을 반복해서 느끼게 되었다. 훔친 속옷을 모아서 버리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만 또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그래서 자신이 밉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으나 속 시원히 상의할 사람도 없어서 괴로웠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정신의학적으로는 ‘절편음란증’이 있다고 표현한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를 주 싫어하고 혐오감까지 가지며 소위 ‘변태’라는 표현으로 비난하게 된다. 조절되지 않는 정신 상태에, 성적으로 매우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이고, 성적 관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절편음란증’을 가진 대부분의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직장 내에서도 능력 있고, 여자에 대한 배려도 많아서 인기가 좋은 경우가 많다. 오히려 여자와 데이트를 할 때 손을 잡자고 하거나 성적인 행동이 전혀 없어서 지적이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성들 사이의 문란한 성생활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여자에게 거절당할까봐 늘 두려워한다. 자신은 여성에게 매력이 없어 보일 것이라 짐작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방 여자가 거절하면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항시 고민을 한다. 여성에 대해 불안 또는 성적 충동에 대한 불안을 감정이 없는 안전한 대상에게로 향함으로써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사랑하는 감정이 극도로 억제되고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주는 여성이라도 좋은 감정이 일시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성적인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의 속옷의 의미는 여성에게 사랑 받고 싶은 욕구를 대신 해주는 대치물인 것이다. 여성에게 사랑을 구할 때 거절당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절충점이 여성의 속옷을 훔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안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속옷을 훔치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고 훔치고 나서는 반복적으로 후회를 하게 된다. 행위자체는 파렴치하고 저속해 보여도, 정신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사랑하고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가 좌절되어서 괴로움을 대신하는 행위라서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랑 때문에 괴롭고 슬프다는 것, 그리고 사랑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 받은 일이다. 김동인/1962년생. 전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받았다. 현재 김동인신경정신과 원장으로 있으며, 시민사회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전주시민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예수병원정신과 과장과 전주시 정신보건센터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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