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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파랑새를 찾아서]
꼬마장수 ‘황토’와 풀어보는 역사 이야기
글 김종필 동화작가·효림초등학교 교사 (2004-02-19 15:26:41)
한 한기가 끝났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나는 방학이 없다면 선생 할 맘이 별로 없다. 배웠다는 놈이, 제때에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뱃속 편한 놈이 무슨 호강에 겨운 소리냐고 나무랄지 모르겠지만 이건 진심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노동강도는 정말 엄청나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몸이 축 쳐져버린다. 체육복 입고 나가 땡볕에서 소리지르며 같이 놀고(?), 들어오자마자 과학실로 가서 화학약품과 유리와 알콜 램프가 주로 등장하는 실험을 하고, 끝나자마자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영어를 가르친다. 재량활동에 특별활동까지 14가지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나는 내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 교사의 방학은 때로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지만 학기 중에 노동 강도를 생각해서 조금 너그럽게 봐줬으면 싶다. 그래도 맥없는 미움이 일어나면 집에서 키우는 초등학생 아이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자기 피 나눔이 임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만 같이 있어도 아웅다웅 싸우고 지지고 볶고 온갖 스트레스 다 주는 것이 아이들일진데, 초등학교 교사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14가지 과목 가르치고, 그것도 모자라 생활지도 까지 한 학기를 해냈으니 조금만 너그러워지시라. 한 학기를 마치는 마당에 넋두리가 길어졌다. 오늘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이번 방학중에 꼭 읽었으면 싶은 책을 한 권 소개해야겠다. 제2회 아이세상 창작동화상 수상작인 『황토』가 그 책이다. 이 책은 우리 반의 9월 독서토론 대상 도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권하는 것은 동화로 읽는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이 있는지 알게 하고싶어서다. 6학년 1학기 사회에서는 우리 역사를 배운다. 선사시대부터 5·18에 남북교류까지 다 담아내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야 특별히 흠잡을 곳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아이들이나 여간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다. 7차 교육과정 6학년에서 학생간의 학력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 과목이 다름 아닌 역사다. 자녀를 집에서 가르치는 부모가 가장 힘들어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대저 우리 역사란 것이 수 천 년 우리 민족의 삶(정치, 사회, 문화예술, 외교, 국방, 법률, 인물, 일상생활....)을 담아놓은 그릇인데, 그 그릇이 어찌 만만한 크기이겠는가? 초등학교니 초보단계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학교 밖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보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역사에 등장하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또 얼마나 복잡한가. 가뜩이나 외우는 것을 싫어하는 요즘 아이들이 지레 손사래를 치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역사 과목을 왜 외워야 하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나는 역사 과목이야말로 이해를 끝낸 다음에는 완전하게 외우지 않으면 다음을 나갈 수 없는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암기가 바로 다음 실타래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부분이 곤혹스러워하는 역사과목에서 튀는 아이들이 있다. 다른 과목은 지지리도 쳐지는데 역사만큼은 우뚝해서 나를 놀라게 한다. 공통점은 다름 아닌 책(위인전)을 많이 읽은 녀석들이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가 모아진 것이 역사인 만큼 시대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시대상이 보이고 사건의 앞뒤가 제대로 엮여진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위인전이라는 것이 역사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나 때로는 혼란스럽게도 한다. 바로 허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특별한 인물이기에 ‘내가 이를 수 없는 꿈속의 위인’ 에 머문다. 위인전을 보면 대개가 요람에서부터(‘태어날 때 유난히 우는 소리가 컸다’ 로 글이 시작된다.) 칠성판을 깔고 누울 때까지 범상치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이래서야 어찌 아이들이 ‘나도 역사에 남는 위인이 될 수 있다’는 꿈이나 꿀 수 있겠는가 말이다. 『황토』는 이런 잘못된 위인관을 깨주며 제대로 된 역사 공부를 시켜주는 동화다. 동학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동화야 이미 여러 권이 발간되었다. 즉 소재로 봐서는 낡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가의 역량 때문인지 참 재미나고 감동 깊다. 동학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오랫동안 발 품을 팔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학에 관련된 여러 권의 동화를 읽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만큼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는 동화를 만날 수는 없었다. 과거에 읽은 동화들은 대부분 전봉준에 초점을 맞췄고 어른의 시각을 아이에게 강요한 느낌이 들어 읽다보면 지루했다. 어른이 지루해 하는 글을 아이들이 붙잡고 있을 리 없다. 덧붙여 이 책이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어린이들에게 영웅 중심이 아닌 민중 중심의 역사 동화를 읽는 기회를 준 것이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나도 그 상황이 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1892년 겨울이다. 탐관오리들의 학정은 어른들의 고통만은 아니다. 이부자리 속의 아이들까지도 가슴 두근거리며 눈뜨게 한다. 무거운 세금과 억울한 옥살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점점 반감을 키워간다. 이 와중에 천하장사인 바위는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에 어린 꼬마장사 황토도 형을 따라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패전 이후 수 십 년이 흘러 3·1 만세운동에도 황토의 아들 석수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참여한다. 일시적인 휩쓸림이 아니라 핏줄에 흐르는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들판의 풀잎처럼, 대접받고 살진 못했어도 나라를 지탱해 온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열두 살 소년 황토가 어떻게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지, 또 어린이의 눈을 통해 본 동학농민전쟁은 어떤 것인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 전기물 속의 한 명의 영웅담만은 아니다. 평화를 위장한 작은 전쟁은 인간의 삶 속에 언제나 있다. 보통사람의 작은 역사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절박한 싸움을 보여주는 일은 과거 어느 때보다 교육적이다」-세계일보에서 인용- 「역사에 남을 영웅이 탄생한 시기보다 영웅이 필요 없어 주목받지 못하는 평화의 시기가 더 소중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백 년 전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듯이 우리도 백 년 후의 사람에게 줄 무언가를 지금 만들고 있다.」-작가의 말-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에게 동학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얼마나 쉽게 이해할 것인가? 역사공부가 어려운 어린이들은 이런 종류의 책을 자주 만나야 한다. 좀 더딜지라도 이처럼 실속 있는 공부방법은 드물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다. 방학한 아이와 불쾌지수 올라가는 싸움을 멈추고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역사를 만나기 위하여 한 번쯤 서점으로 나들이라도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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