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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 | [삶이담긴 옷이야기]
영어 못하면 디자이너 못한다?
글 최미현 패션디자이너 (2004-02-19 15:03:03)
할 일은 밀려있는데도 일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놀러나가지도 못하면서 어정거리는 때 괜히 죽어나는 것이 텔레비전 채널이다. 이것도 재미없고 저것도 시원치 않고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리모콘 배터리만 열심히 소진시킨다. 그러다 가끔 패션쇼가 나오면 직업이 직업인지라 열심히 처다 보는데, 보다보면 내가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것이 맞나 싶다. 이번 시즌 트랜드는 울트라 슈퍼 페미닌 글레머고, 글로시 한 텍스춰에, 머메이드 실루엣의 드레스는 홀터네크로 소프트한 터취를 더하고, 메인 칼러는 레드, 바이올렛, 퍼플이고 악센트 칼러는 그린이고 등등. 눈으로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뭔 말이냐 싶어서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번역을 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응, 그런 뜻이구나 하고 해석이 된다. 더욱 가관인 것은 패션쇼 가 끝나고 디자이너가 짧게 자신의 의상에 관해 설명을 할 때이다. 한국말로 설명을 하면서 디자인이라든가 디자이너라든가 패션쇼라든가 하는 단어에는 콧소 리를 내면서 혀를 굴린다. 그걸 보면서 '그럴 거면 다 영어로 해봐'하고 혼자 말을 내뱉어 본다. 토막영어보다 점잖은 한국어가 훨씬 듣기 좋은데 왜 저러나 싶다. 그래서 의상디자이 너들 사이에서 영어 못하면 디자이너 못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원래 우리 옷이 아니고 그래서 용어도 자연히 외국어로 되어있 다. 또 서양의복이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 전파되었기에 아직도 많은 부분은 일본어로 되어 있고 의류산업 현장에서는 일본어로 된 봉제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정확한 일본어가 아닌 한국 화된 일본어가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어에 영어에 일본어에 뒤섞인 잡탕이다. 오죽하면 1999년 문화관광부에서 패션디자인 용어 순화집을 간행했겠는가. 그 많은 용어들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다 아는 것 도 아니어서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두꺼운 의상용어사전이 따로 있다. 사실 디자인이니 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우리나라말로 번역할 수도 없고 번역되지도 않는다. 만약 외국 사람이 한복을 배운다면 길이나 섶이나 배래, 수구 같은 용어를 그대로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영어로 된 단어들을 일종의 과시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주어 섬겨야만 그럴싸하게 보일 거라는 그 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외국에서 패션쇼를 해야 일류 디자이너 대열에 낄 수 있고, 철마다 외국을 드나드는 것을 자랑처럼 떠들어댄다. 물론 외국과 교류도 활발해야 하고 정보도 빨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교류가 양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일례로 서울에서 열리는 여느 패션쇼에도 국제적인 바이어나 언론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초청장을 보내는 데도 말이다. 올 봄 서울 콜렉션에서 몇 안 되는 일본기자들에게 국내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감상을 묻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디자이너들이 수천만 원을 들여서 진행한 쇼에 관객은 거의가 학생이다. 또 국내에서 발간되는 패션잡지들은 한결같이 외국 유명잡지의 한국판이다. 한국에서 자생한 패션잡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과연 세계 속의 한국인가. 국제 경쟁력이란 결코 흉내로는 되지 않는다. 문화전쟁이라 불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칼과 방패를 만들 것이며, 그것이 그 전쟁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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